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문화유산의 숨결을 찾아(정읍편)
작성일
2006-08-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246

구국정신과 예술문화가 샘솟는 고을 백제 여인네의 애틋한 정한이 서린 ‘정읍사’의 연원지이자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효시라 일컫는 ‘상춘곡’의 고장, 또한 프랑스혁명보다 이념적 측면에서 한 차원 높게 평가되는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 정읍. 정읍은 미래의 후손들에게 물려 줄 유산이 풍부한 전통문화의 보고이자 격조 높은 예술향이 늘 서려 있는 곳이다. 풍류와 격조 높은 예술문화의 고을 백제문화가 꽃피던 시절, 서민들이 부르던 백제가요 5곡 중에서 ‘정읍사’는 그중 단연 으뜸으로 꼽을 수 있겠다.

장사를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높은 산의 바위에 올라 남편을 걱정하며 부른 곡이다. 훗날 이 여인이 서 있던 자리의 바위를 망부석이라 불렀다.

신라 말 태산군(정읍시 태인과 칠보면 지역) 군수를 역임한 최치원崔致遠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그 명성을 중국 당나라에까지 널리 떨쳐 당서예문지唐書藝文志에까지 그의 이름을 올렸다. 당으로 유학을 갔던 시절 지은 시로 추정되는 秋夜雨中(추야우중)이다. 秋風惟苦吟(추풍유고음)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마음은 만 리 밖을 내닫네. 그 밖에도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상춘곡’. 청렴함을 인정받아 전라남도 관찰사까지 지낸 불우헌 정극인이 말년인 성종 연간에 벼슬에서 물러나와 처가인 태인에 은거, 자연애를 바탕으로 한 풍류를 통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즐거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는 후일 송순의 ‘면앙정가’를 거쳐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지는 강호가도의 시풍을 형성, 가사문학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정읍 농악은 마을마다 전승되어 온 농악에 세습무집단의 예능과 접목되어 예술적으로 한 차원 발전한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1920년대에는 지역종교인 ‘보천교’에서 농악을 종교음악으로 채택하여 더욱 발전시켰으며 전국 각지의 농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정읍을 빛낸 예술가를 꼽자면 추사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초서에 능했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에서 한국미술의 뛰어남을 보여준 전수천 화백,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마흔셋이라는 이른 나이에 요절한 박정만 시인 등이 있고, 태허스님을 은사로, 당대의 큰스님 경허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아 득도하고 근대 선禪불교를 중흥 시킨 만공선사, 송월주 스님 역시 정읍 출신이다. 애향, 애족의 구국 혼이 살아 숨 쉬는 고을 임진왜란 직전 충무공 이순신은 정읍 현감으로 부임, 1년 6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이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자 이 지방 유림은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는 뜻에서 사당인 유애사를 지어 구국의 넋을 기리고자 하였다. 또한, 동래부사로서 왜군에게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한 송상현 역시 지금의 정읍인 고부가 고향이다. 임진왜란 당시 정읍, 태인의 선비인 안의와 손홍록 등이 주도하여 이 태조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 용굴암과 은봉암에 안치시켜 오늘날 우리에게 살아있는 역사로 남게 했다. 또한, 구한말 항일운동의 시작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그 효시였다. 정읍은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로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혁명의 주요한 지도자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동학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동학의 이념과 정신은 구한말 민족 최대의 신흥종교였던 ‘보천교’에 쏠리게 했다. 전국적으로 무려 600만의 신도를 자랑했던 ‘보천교’는 일제 강점기에 ‘물산장려운동’을 통해 민중에게 나라에 대한 사랑을 독려했으며 상해임시정부에도 가장 많은 금액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운동은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이어지게 했고 사이비 종교라는 흑색선전과 각종 공작으로 교주인 차경석을 죽음으로 내몰아 보천교는 1936년 와해되기에 이른다. 일본 신궁의 위세를 꺾기 위해 지은 보천교 본당 십일전十一殿은 지금도 종로 조계사의 대웅전을 덮고 있다. 이외에도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전라도 각지의 유생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7월 15일, 내장사에 53명의 유림이 모여 일본에 대한 복수를 결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은 1906년 4월,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개최하여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의 운명을 부르짖고, 이에 80여 명의 선비가 거의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성창의武城倡義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정읍출신의 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가 일본대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투옥되었다가 순국하였는데 거사 전 그가 결의한 말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아직도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 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평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김지하 시인이 대설 남南이라는 담시에서 ‘우주의 단전이자, 한반도의 배꼽’이라고 노래했던 정읍. 이제 정읍은 지난 세기의 훌륭한 정신적,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세기, 새로운 세상의 중심도시로 뻗어나갈 희망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샘 고을 정읍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고비리국과 초산도비리국에 속해 있었다. 초산은 정읍의 옛 지명이며, 정읍은 전라북도 남부 중앙에 있는 군으로 본래 백제의 정촌현인데 신라 경덕왕 때 정읍으로 고쳐서 태산군(현재의 태인)에 속하였고, 고려조에는 고부군에 속하였다. 후에 감무(지금의 군수)를 두고 조선 때 현감縣監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년) 정읍군으로 승격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부군의 15개 면, 정읍군의 8개 면, 태인군의 18개 면이 합하여 정읍군이 설치되었다. 이후 1981년 정주읍이 시로 승격되어 정읍군과 분리되었다가 1995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정읍시로 개칭, 통합되었다. 글 _ 편집실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