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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답사기] 북악산과 서울성곽이 포근히 감싸 안은 성북동 마을 기행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6-12-27
조회수
4402
작성자 : 김성수님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입선(14위) 수상작]   옛 도시가 번화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 중에 한 가지가 성곽 유적일 것이다. 성곽은 과거 군사적 기능과 동시에 도시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 전국에는 그 기능과 축성 방법, 위치, 시대를 달리하는 성곽유적이 수없이 많이 남아 있으며, 서울성곽과 같은 도성의 역할을 한 곳도 서울, 경주, 부여, 공주 등 당대 수도였던 지역에 아직 잘 보존, 복원되고 있다. 조선의 도성 역할을 한 서울성곽(서울城郭, 사적 10호)은 길이 약 17km로써 4대문과 4소문을 포함하여 돌을 이용한 축성술이 매우 정교하고 웅장하여 조선 성곽 유적으로써 일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세운 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조선의 흥망과 함께 하며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과정에서의 파괴를 거치며 1960년대 이후 도시개발에 밀려 많이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정부의 서울역사도시 조성 계획에 따라 서울 성곽의 정비와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어 도심속에서 시민들의 산책로와 공원으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서울성곽이 잘 보존되고 있는 지역 중에서도 성북동 일대를 돌아보며 38년 만에 개방된 서울성곽 4대문 중에 하나인 북대문, 즉 숙정문(肅淸門)을 답사 여정에 포함하여 성곽이 감싸 안은 이 골짜기에 잘 보존되어 오고 있는 과거와 근,현대의 문화유산을 4월의 봄기운을 느끼며 즐겨보기로 하였다.  먼저 지난 4월 1일에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역사적인 서울성곽 숙정문 권역답사를 4월 7일자 문화재청 인터넷 홈페이지로 예약하였기에 이 날을 성북동 마을 답사일로 잡고 부디 날씨가 화창하기만을 기대했다. 원래는 4월 2일에 예약을 하였는데 전날 내린 봄비가 휴일 내내 내린다기에 취소를 하였었다.  답사 전날 카메라를 손질하고 들뜬 마음에 아침에 일어나 숙정문 권역답사 1회 예약시간에 맞추어 아내가 준비해준 간식을 갖고 집을 나섰다. 전철 4호선을 이용하여 한성대입구역 5번이나 6번 출구로 올라오면 출구 앞으로 경복궁의 진산(鎭山) 북악산과 멀리 서울의 진산(鎭山) 북한산이 바라보이고 그 산 아래 골짜기가 형성되어 도로 양쪽으로 성북동 마을이 시작된다. 1960년대 인간소외, 도시와 자연파괴를 묘사한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의 배경이자 대한민국 부자 1%가 산다고 하는 이곳. 골짜기를 기준으로 우측으로는 성락원 마을, 꿩의 바다마을, 학의 바다마을, 대교단지 등 독특하고 아름다운 이름의 고급 주택가와 빌라촌, 각국의 대사관이 형성되어 부촌의 이미지가 확연하며, 골짜기 좌측으로는 서울성곽을따라 옹기종기 달동네가 형성되어 성북동은 도로를 기준으로 확연히 다른 특징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우리나라 몇 안되는 독특한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북동 마을 여행은 한성대입구역에서부터 걸어서 삼청각까지 천천히 구경할 수 있는데 먼저 숙정문 답사를 위하여 성북동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예약시간에 맞추어 삼청각 옆 홍련사 입구까지 걸어서 도착했다. 아직 숙정문 권역 개방 초기라서인지 버스 종점에서 홍련사 입구까지 걸어가는 구역은 너무 좁고 안내판 하나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초행자들의 접근이 조금 불편하였다. 숙정문 권역의 개방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그 범위가 확대되어지면 서서히 개선되리라 생각된다. 오전 10시가 약간 넘은 시간에 입구 임시대기소에서 간단한 신분확인과 함께 산행이 시작되었다. 숙정문 개방은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1.21사태) 이후 특정경비지구로 지정되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지 38년만의 일로써 최근 서울의 청계천 복원사업, 숭례문 개방등과 함께 기념비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개방을 준비하면서 만들어진 것 같은 산행길은 비록 약간의 통제와 함께 이루어지긴 했으나 오랜 세월 인적이 끊긴 곳이라서인지 한결 호젓하고 상쾌하였다. 일행 중 대부분이 연세가 좀 된 어르신들 이였지만, 간간이 젊은 연인들도 있었고,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도 있었다. 산행 과정에서 사람들의 대화내용은단연 1968년 당시 청와대 기습사건 전후의 이야기였었다. 이윽고 숙정문에 오르자 아픈 역사의 뒤안에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온 세월의 무게와 함께 문화재보호재단 소속의 인자한 문화재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일행들은 더욱 진지해졌다. 또한 계획된 짧은 일정이라 문루에 올라가서 주변의 경관과 기념사진을 남기느라 다들 분주했다. 숙정문에서 성곽을 따라 만들어진 경비 초소들을 보며 600여년의 세월을 넘어 현재까지 여전히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숙정문은 서울성곽 4대문 4소문중 풍수지리적위치와 함께 역사적으로 가장 사연이 많은 성문으로 문을 열어놓으면 도성안의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폐쇄하기도 했었다고 한 것처럼 한양의 음양의 기운을 조절하는 역할도 했다고 하나 축조 당시부터 통행의 목적이 아닌 도성 북쪽을 향한 방위의 개념으로 세운 상징적인 문이라고 한다. 성곽 안쪽으로 숙정문에서 촛대바위에 오르면 서울시내를 훤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으나 날씨가 약간 흐리고 황사까지 조금 있어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 1.1 km 구간의 짧은 구간이 우선 개방되었지만 최소한의 경비구역을 제외한 청와대 뒷산을 내년 10월까지 단계적으로전면 개방한다고 하니 시대의 흐름과 함께 아픈 역사의 일부가 조금씩 복원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단체행동과 약간의 통제 그리고 제한된 시간 때문에 아내가 정성스럽게 싸준 간식도 못먹은 불편함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다음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이 역사적인 현장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다음 답사팀들이 대기하고 있는 홍련사 입구로 다시 내려와 해산한 뒤 나는 본격적으로성북동 마을을 답사했다. 하산길 삼청터널 앞 도로 옆에 위치한 삼청각(三淸閣)은 청운각(靑雲閣), 대원각(大苑閣), 선운각(仙雲閣) 등과 함께 60.70년대 요정정치의 핵심이자 역사적인 회담장소로도 사용되다가 2001년 음식점과 문화공연장으로 탈바꿈하였다고 하나 입구부터 비밀스럽고 권위주의적인 그 이미지는 여전히 잔존하는 것 같았다. 과거 한때 권력자들의 비밀스럽고 비정상적인 모임장소로 사용되어진 이 고급요정들도 대중문화시설이나 종교시설로 변화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성북동 버스 종점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우측으로 "심우장" 이정표가 나오며 약간 가파른 좁은 골목길(심우장길)을 따라 약 10분 정도 오르니 집들 사이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97~1944) 선생께서 말년 동안 기거한 심우장(尋牛莊, 서울시기념물 7호)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마주하는 것이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짓고, 칩거하면서 평생 독립운동과 함께 고초를 겪으면서도 변절하지 않은 그의 강직한 성품과 종교인으로서의 검소하고 단정했던 삶을 읽을 수 있으며 충남 홍성의 생가와 계동 44번지 가옥과 함께 선생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적이다. 창을 통해 본 그의 유품과 시 『님의 침묵』과 『독립선언서』를 감상하면서 선생의 발자취를 되새기며 마루에 걸터 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심우장길을 다시 나와 큰길(성북동길)로 내려가면서성북동의 대표적인 근대 전통가옥인 이태준가(李泰俊家, 서울시 민속자료 11호)와 이재준가(李在濬家, 서울시 민속자료 10호)를 찾았다. 이태준가는 성북2동 사무소 옆에 대문에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당호로 현재 후손이 살림집과 함께 전통찻집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대문 안쪽으로 들어가 잠깐 안을 구경했다. 문향루(聞香樓)라는 현판이 있는 대청과 우물, 나무, 돌절구 등으로 작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민 마당은 우리나라 민가정원의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상허(尙虛) 이태준(1904~?)은 활발한 작품활동과 사회운동을 하면서 해방 직후 월북을 하였는데 대부분의 월북작가가그러하듯이 그 작품성에 비해서 아직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수현산방에는 그의 삶의 흔적과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도로건너 언덕 위 덕수교회 안에 있는 이재준가는 교회 부속건물로 사용되어지고 있어서인지 아쉽게도 건물 개방이 안되어 있었다. 담장 너머로 내부를 보고 있으니 교회 관리인으로 보이는 60대 초반의 어른께서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뭘하느냐고 물어보신다. 단순히 문화재 관람을 하고 있던 나는 남의 집에 불법으로 침입을 한 외부인이 되고 말았다. 낮은 목소리로 문화재 답사를 왔다는 얘기를 하니 그제서야 약간 의심을 푸셨는지 "뭘 볼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저만치 걸어가신다. 1900년대 초의 전통가옥으로서 살림집이라기 보다는 별장 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이 건물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아쉬웠으나 다음기회에는 꼭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덕수교회 맞은 편에는 붉은 벽돌건물의 오래된 건축물이 보인다. 이 건물은 "천주교한국순교복자수도원" 으로서 1955년 건립한 근대건축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아치형으로 약간 돌출된 창문과 조각상들 그리고 건물 중심 상부의 청동 돔 형상물이 다소 이국적이면서도 고전적이다. 검은 철문 너머로 한참동안을 쳐다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다만 환하게 만개한 목련과 개나리가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진명의 시『복자수도원』에서 묘사한 장면이 바로 이곳임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 점심시간도 훌쩍 지나간 것 같았다. 간송미술관 앞 칼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 성북동 일대는 여러 메뉴의 맛집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기도 한다. 일제시대 외국으로 밀반출될 위기의 문화재를 사비로 수집하며 한평생 문화재를 사랑한 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이 1938년 보화각(?華閣)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설립된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은 대부분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전시와 연구,사회교육를 주목적으로하고 있지만 간송미술관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라는 부속기관을 두고 한국미술사연구에 그 목적을 두고있기에 1971년이래 1년에 기획전시를 통하여 봄,가을 딱 2주간만 개방한다. 국보 12점, 보물 10점, 그 외 다수 지정문화재와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국보,보물급 문화재가 상당수 소장되어져 있다고 한다. 항간에는 그 폐쇄성과 미술품 공개를 잘하지 않는 특성 때문에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간송 선생의 문화재 사랑만큼은 누가 뭐라 해도 의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 보화각 건물인 미술관은 명성에 비해 외형적 화려함은 전혀 없지만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약 40년간 한국미술사연구에 외길을 걸어온 소위 간송학파(澗松學派)의 산실인 것에 그 진면목이 있음을 짐작한다. 미술품을 감상하는 안목은 없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이번 봄 기획전시에도 이곳을 찾게 될 것이다. 성북동의 서울성곽 답사코스는 이 간송미술관앞 도로건너에서 시작할 수 있는데 최근에 성곽아래 민가를 헐고 야경을 위한 조명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최근까지 성곽 바로 아래에 민가가 있어서 자연스런 민가의 담장역할을 하기도 했다. 성곽아래가 정비되어 돌을 이용한 축성기술을 잘 관찰 할 수 있게 되었으나 한편으론 과거 성곽아래 올망졸망 붙어서 있던 우리네 이웃들의 살가운 경관들을 영원히 볼 수 없다고 하니 아쉬웠다. 조명시설이 주변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은 채 만들어져 이 사업이 졸속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기도 했다. 북악산 정상을 향해 뻗어있는 서울성곽의정비가 숙정문 개방과 함께 서울의 역사도시 조성 계획의 일환이라고 한다면 부디 단순한 복원과 관광지 개발이 아닌 진정한 도시와 어우러지는 문화유적이자 생활공간이되길 바란다. 성곽 아래 조명시설을 따라 그 동안 숨겨져 왔던 부분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돌 다루는 솜씨는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대표인 고인돌 유적이 한반도에 전 세계수량의 60%가 분포하고 있는 것과 여러 석조유물을보더라도 우리의 돌다루는 기술은 세계적임이 분명하다. 서울성곽을 다시 내려와 조선시대 왕비들이 친히 잠례를 치르며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의 신위(神位)를 배향(配享)하던 선잠단지(先蠶壇址, 사적 83호)를 둘러보고, 선잠단지 옆길을 따라 고급주택가와 대사관저가 모여있는 전형적인 부촌 속에는 19세기말 지어져 의친왕(義親王, 1877~1955) 이강(李堈)이 별궁으로 사용하기도했던 성락원(城樂園, 사적 제378호)이 그 비경을 보여주지 않은 채 숨겨져 있다. 아직 정식개방이 안되어서인지 보수공사와 함께 문이 잠겨져 있어서 담장너머로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린 답사가 아닌데도 시간이 오후 5시가 넘었다. 성북동의 또 다른 과거 요정정치의산실이였다가 지금은 길상사(吉祥寺)라는 사찰로 바뀐 대원각(大苑閣)과 오늘 마지막 답사지로 정했던 네셔널트러스트 운동에 의해 보존되어진 ''시민문화유산 제1호''라고 하는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였던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1916~ 1984)선생 옛집은 시간이 안되어 다음날 간송미술관을 찾아올 때 꼭 둘러볼 것을 기약하며 오늘 성북동 마을 여행을 마감해야 했다. 600여년의 시대흐름 속에서 그 자리를 지켜온 서울성곽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성북동은 요즘 새로운 개발바람으로 제2의 『성북동 비둘기』를 연상시키고 있다. 거리 곳곳에는 재개발을 안내하는 부동산이 즐비하여 곧 닥쳐올 이 지역의 개발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상황은 비단 이곳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전체는 하루가 다른 개발 사업과 함께 개인들의 과잉된 사유재산 방어와 정부의 문화재 보호정책의부재로 인하여 근대문화유산은 물론 많은 유적,유물들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개인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변화와획기적인 문화재 보존정책과 함께 개발과 보존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진정한 반만년 역사의 나라로 이 땅을 후손에게 길이 물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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