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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문화 탐방 - 혜음원지 답사기
작성일
2005-12-2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578

고단한 여행객들의 쉼터이자 예종의 백성 사랑이 깃든

고려시대 국립 숙박업소 혜음원지惠蔭院址에 가다

지친 걸음 쉬어가라 아랫목 내어주고 등에 진 봇짐도 받아주고 혜음령 고개 산적도적 겁내는 나그네에겐 따뜻한 위안도 되어주던, 이제는 인적도 끊기고 무심한 바람만이 오가지만 혜음원의 천 년 전 인정人情만은 세월무상에도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지난 3월 화사한 초봄의 햇살을 받으며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고려시대 국립 숙박시설인 혜음원지를 찾았다. 혜음원은 고려 예종(1122년) 때 완공된 여행객 숙소로 당시 수도인 개경에서 남쪽으로 약 50여km, 남경(지금의 서울)과는 20여km 거리에 위치해 개경에서 남경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 옛날 개경에서 남경에 볼 일이 있으면 새벽밥을 해먹고 임진강을 건너 부지런히 걸어야만 해질 무렵에 혜음원지 부근에 도착하게 되는데 혜음령 고개가 있는 이곳은 산세가 높고 인적이 드문데다 산적이 자주 출현하여 혼자서는 고개를 넘기 어려웠다고 한다.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에는 혜음원 건립에 대한 기록이 전해오는데 ‘1109년 8월, 예종은 신하인 이소천에게 남부 지방에 대한 암행을 지시하여 이 지역이 사람의 통행이 많으나 산세가 높아 호랑이나 산적이 출몰하여 1년에 1백여 명이 살해된다는 이소천의 보고를 받고 예종이 숙박시설을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고 나와 있으며 ‘이소천이 묘향산의 혜관스님을 찾아가 일꾼으로 일할 승려 백여 명과 경비를 마련하여 1120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해 2년만인 1122년 2월에 완공하였고 그 후 왕이 남경 순행할 때를 대비하여 추가로 왕이 숙박하는 행궁을 설치했다고 하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되어있다. 당시 사찰에서는 주요 교통로 인근에 숙박시설인 원을 결합한 형태의 사원을 운영해 왔는데 신도들이 희사한 미곡으로 이자를 받아 여행객에게 죽을 쑤어 급식하였다고 한다.

   혜음원지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만 트여 있어 혜음령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바로 보이는 곳에 위치하며 6천 평 정도의 부지에 계단식으로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혜음원지 서쪽 개울에서는 이름 모를 민물고기들이 햇살에 반짝거리고 아직 발굴이 이뤄지지 않은 논바닥에는 봄빛이 완연하였다. 서쪽 논길로 7~80m 올라가면 발굴지 하단 부분이 보이고 그 위로 넓게 들어서는 곳곳에 초석과 장대석이 나타나는데 천 년 전 문화유산의 장엄함에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혜음원지는 이곳 주민이 1999년 폭우로 인하여 이 지역의 상단부터 토사가 흘러내리면서 「혜음원」이라는 문구가 양각된 기와가 발견되면서 천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려시대의 문화유산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혜음원 서쪽 편에는 계곡과 인접하여 우물이 있는데 그 곳에는 아직도 물이 가득하며 바로 근처에 부엌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곳으로 연결되는 화강암 계단은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다녔음을 짐작하게 하듯 아직도 반질반질하다. 수많은 여행객에게 음식을 접대하기 위해서 하얀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수 없이 화강암의 계단을 드나들며 이마의 땀을 닦아 내던 곱단이가 떠올려지는 것은 나의 지나친 상상일까?



   혜음원지의 좌우 계곡을 중심으로 중앙에 나 있는 계단식 통로를 보면 상당히 큰 규모의 시설임을 한 눈에 느낄 수 있게 하고 중간 정도에 들어서면 청석이 바닥에 장식되어 있고 화강암 초석에 십자가 모양의 음각이 파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윤장대가 있어 한 번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는다는 불교적인 의식이 행해진 장소로 추정되고 있다.
   동쪽 상단 끝 부분에는 왕이 유숙하는 행궁이라는 처소가 1백여 평 규모로 자리 잡고 있으며 초석이 궁궐 방식처럼 좌우대칭의 형태를 갖추고 담장이 견고하게 설치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행궁과 담장 사이에는 커다란 우물이 있는데 현재는 물이 고여 있지 않지만 발굴 당시에는 물이 많이 나왔다고 하며, 배수로를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동쪽 산비탈을 이용하여 물이 떨어지는 곳이 있다.



   이곳에 떨어진 물은 널찍한 바위에서 포석정처럼 물길로 흐르다가 배수로에 다시 떨어져 북쪽 배수로와 합쳐지고 수문을 열고 닫는 부분에서 일정량이 담수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보이지 않는 건물 뒤편이고 또 동편 담장 아래에 있을 뿐 아니라 담수되는 한 가운데에 긴 장대석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에서 빨래를 하거나 목욕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동쪽 배수로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오면 폭 6m, 길이 15m 정도의 면적에 지상보다 약간 높은 초석이 일정하게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은 서울의 경회루처럼 누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누각 아래에는 북쪽과 동쪽에서 내려오는 물이 다시 모이는 곳으로 동쪽 산에 노송이 우거져 있고 남쪽으로 혜음령이 훤하게 내려다 보여 왕이 행차할 때면 지역의 호족과 함께 연회가 베풀어졌을 것으로 상상된다.

   혜음원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주로 고려시대 자기와 기와편 등으로, 완성된 유물은 드물며 15cm 정도 크기의 휴대용 불상이 발견된 정도이다.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건물들은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막새류 중에 글자가 새겨진 명문암막새는 막새면 좌우에 귀목문을 두고 그 사이 중앙에 세로로 “惠蔭院”이라 양각되었다. 글자체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하나의 글자판형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혜음원지는 출토된 유물이 주로 낮은 배수로 쪽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당시 시대 이후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기와조각 등이 붉은 색을 띄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몽고군 칩입시 대규모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계곡에 고사목과 함께 주춧돌이 뒹구는 이곳은 우리 선조의 애환이 물들어 있어 고려의 흥망성쇠를 되돌아보게 한다.



   햇살이 따뜻해서인지 도로변 인근의 밭과 논둑에서 봄나물 캐기에 여념이 없는 아낙네들을 보니 1천 년 전의 아낙네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바람마저 향기롭다. 천 년을 잠들었던 조상들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비운의 역사를 업보로 갖고 태어난 우리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며 답사를 마치고 완연한 봄 속으로 돌아간다.

이기상 / 파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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