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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산 최초의 개인종합병원 ‘백제병원’
작성일
2023-12-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60

부산 최초의 개인종합병원 ‘백제병원’ 부산역 맞은편은 상해거리(차이나타운)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의 붉은 간판으로 가득한데, 이곳은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 부산의 근현대사 일면을 보여주는 곳이다.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부산은 개항 이래 100여 년 전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많았던 곳이다.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에 의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게 근대라는 시간을 맞이했다. 지금 부산에는 100여 년 전 그 최초였던 것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01.부산 구 백제병원. 1927년. 국가 등록문화재 02.부산 구 백제병원 03.외벽과 창문

100여 년, 백제병원이 거쳐 온 시간

‘부산 구 백제병원’은 100여 년 전 지어진 붉은벽돌의 4층 건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개인 소유다. 부산역 앞 큰길에서 조금 들어가면 상업시설물 가운데 멋스러운 옛 백제병원이 눈길을 끈다. 부산 구 백제병원은 ‘백제병원’이라는 이름의 의료시설로 건축되었는데, 최용해(崔鏞海, 1894~?)가 부산 초량동 현재 위치에 1927년 서양식 입원실을 마련하여 신축한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이다.


그 당시 백제병원은 부산부립병원(1877년 개원), 철도병원(1923년 개원)과 함께 부산 지역의 중요한 의료기관이었다. 1932년 최용해는 백제병원을 돌연 폐업하고 일본으로 갔고 이후 최용해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1933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백제병원을 중국인 양모민(楊牟民)에게 팔았고 봉래각이라는 중국요리점을 개업해 번성했다. 양모민이 1942년 봉래각을 폐업하고 중국으로 돌아간 후, 백제병원 건물은 부산에 주둔한 아카즈키(赤月)부대의 장교 숙소로 이용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부산치안대 사령부 사무실, 중화민국 임시 대사관으로 잠시 사용되었다가 개인에게 불하되어 1953년에는 예식장으로 개업했다. 1972년 화재로 건물 내부가 불에 타고 건물의 외부 골조만 남게 되어 부산시의 철거 명령으로 5층을 해체하고 내부를 수리하면서 지금의 4층 건물로 남게 되었다. 이후 내부를 수리하여 사무실, 식당, 부동산 중개소, 종교시설 등 다양한 업종의 상가 건물로 사용되다가 그 사이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2014년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04.내부 모습 05.내부 목제 계단

조선인 원장이 경영하는 최신 서양 의료시설

옛 백제병원은 원래의 용도와는 다른 상업시설로 오랜 시간 사용되었지만, 다행히 외형과 내부의 목조계단, 벽, 타일 등 건축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외형은 그대로 보존하고 내부는 원래의 흔적을 찾아 원형을 복원하고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어 보수 및 개조 과정을 거쳤다(사진 3, 4, 5).


옛 백제병원은 부산역을 중심으로 매립되기 이전의 초량(草梁)에 최용해가 1921년 백제의원으로 개업한 부산 최초 조선인이 운영한 개인 의원으로 출발했다. 백제병원은 입원실과 최신식 X-ray를 설치하여 서양 의료시설을 구비한 부산에서 유일한 개인 병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전통적 한방 의료에 신뢰가 두터운 분위기였지만, 백제병원은 최신식 의료시설뿐만 아니라 최용해 원장의 친절한 태도와 선행 등 입소문이 나면서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최용해 원장은 백제병원이 있던 그 자리에 거액을 들여 건평 55평에 4층의 입원실을 갖춘 근대적 양식의 병원을 1927년 신축 완공했다.


신축한 백제병원은 각 병실에 전기장치와 최신식 제반 의료시설을 완비하고, 옥상은 환자들의 휴게실 공간으로 꾸며 환자들을 위해 일본 도쿄에서 주문한 최고급 라디오와 피아노까지 구비했다. 백제병원의 신축과 동시에 바로 옆에 건평 60평에 6층(지하 1층)의 병원 건물을 설계하여 백제병원의 확장을 진행하였다. 백제병원의 거대한 규모와 최신 서양 의료시설은 부산에서는 그 어느 병원과도 비교할 수 없었고, 개인 병원으로서 전국에서도 유일한 의료시설이었다. 이러한 백제병원에는 일본과 독일의 의학박사를 초빙하여 신진 의술을 환자에게 제공하였고 외과·내과·이비인후과·치과·약제과 등 종합병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사라지지 않고, 멈추지 않아 계속 쓰임을 받는 곳

백제병원 원장 최용해는 김해 명지 출신으로 일본 오카야마 의학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부산 초량에서 백제병원을 개원한 이후 승승장구하다 1932년 일본인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야반도주하였다고 전할 뿐이다. 병원을 신축한 뒤 5년 만에 갑작스러운 행방불명은 1929년의 신문기사와 관련 있을 듯하다. 초량 백제병원에서 사망자를 해부한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사건이 백제병원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입장 표명의 광고까지 낸 것을 보면 당시 파장이 컸던 것 같다. 서양 근대 의학에서는 해부학이 필수과목이었지만, 당시 정서는 용납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결과로 병원 사정의 악화도 추정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조선인 원장이 경영하던 최신 의료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이었다는 점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산 구 백제병원’은 지금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기에 일제강점기 조선인 의학박사 최용해를 생각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한다. 한편으로 최용해 원장이 백제병원을 멋있게 건축한 덕분에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또 멈추지 않고 계속된 쓰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백제병원의 지난 100여 년의 시간은 마치 부산 근현대사의 굴곡진 여정을 보는 듯하다.


글, 사진. 최은령(부산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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