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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구한 역사가 남아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
작성일
2023-06-2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42

장구한 역사가 남아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 울산 반구대 암각화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국보 중의 국보로 통칭되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장구한 역사와 문화가 한 장의 돌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찬란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리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로 구성되어 있다. 대곡리 암각화는 울산시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 마을 앞 절벽에 새겨진 신석기시대 암각화이고, 천전리 암각화는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반구마을 큰 바위 면에 청동기시대 암각화와 신라시대 암각화가 함께 새겨져 있는데 지정 명칭은 천전리 각석이다. 이를 혼동하여 대곡리 암각화만 반구대 암각화로 쓰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4월에 「반구천 일원의 암각화」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 등재신청 후보로 선정되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알아본다. 00.대곡리 암각화 근경

귀중한 문화유산과 첫 대면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한 지역에서 2년 연속으로 발견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1970년 12월 24일에 천전리 암각화가 발견되었고, 그다음 해인 1971년 12월 25일에 대곡리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천전리 암각화는 필자가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조사 책임자로 있던 시절 울산 지역 불적조사팀에서 실시한 울산 지역 불적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울산 지역 불적을 집중적으로 조사한 동기는 고신라에서 중국·일본·동남아 등 외국과 교류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항구였던 울산이 고신라의 문물 교류의 전진기지이자 그 중심지로서 중요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01.대곡리 암각화 전경

1970년 12월 24일, 울산반구대를 조사하였다. 이 반구대는 정몽주 선생이 3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며,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안신사심론』 등 세 권의 저서를 집필한 반고사 터로 추정되었으므로 가장 중요한 조사대상지였다. 사연댐 물에 잠겨있는 반구대 반고사지를 본 후 한 굽이 위의 반계천 냇가에 있는 연화사 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천만뜻밖에도 절터 바로 옆에 있는 천전리 암각화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암각화에는 원, 마름모 등 청동기시대 문양들과 암면 하단에 화랑과 왕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게 우리 역사에서 너무나 귀중한 문화유산과 처음 대면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1971년 3월부터 2개월 넘게 이 천전리 암각화를 본격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경 나온 대곡리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마을 앞 냇가 절벽에 호랑이 그림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우리 동국대 박물관 조사팀은 대곡리 암각화의 상단 일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역시 그다음 해인 1972년 3월부터 3주간 물에 잠긴 하단 1m 이내를 제외한 대곡리 암각화 전모를 조사하게 된다.


02.대곡리 암각화 호랑이 묘사 03.동물과 사람이 묘사된 대곡리 암각화 세부 사진 ©울산광역시청

생생한 생활상, 의식세계가 나타난 대곡리 암각화

대곡리 암각화는 주암면이 너비 10m, 높이 3m 정도의 절벽 암면에 사람과 고래·사슴·호랑이 등의 동물, 배 등의 물상 250여 점이 파노라마처럼 새겨져 있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사람은 탈 얼굴·춤추는 무당·사냥꾼·뱃사공 등의 수십 인, 사슴은 노루·고라니·대륙사슴 등 60여 마리, 호랑이·표범 등은 15마리 정도, 멧돼지는 7마리 정도 된다. 고래는 귀신고래·부리고래·흑고래·북방귀신고래·혹등고래·들쇠고래·향고래·돌고래 등 10여 종 50여 마리나 새겨져 있다. 이처럼 사람과 물뭍동물들이 역동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유연하면서도 단순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신석기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생략할 때는 과감히 생략하고 강조할 때는 지독히 강조하는 표현주의 기법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신석기인들의 예술적 감각이 범상치 않았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또한 사냥꾼들이 멧돼지나 사슴을 창이나 올가미로 잡고 호랑이 등을 울이나 그물로 포획하는 생생한 장면도 묘사되어 있으며, 고래를 작살로 잡아 끌고 가거나 요동치는 장면도 연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춤추는 무당이 사냥이나 물고기를 잡고자 하거나 이미 잡아 의식을 행하는 장면도 표현되어 있어서 신석기 당시 의식세계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신석기 사람들의 생생한 생활상이나 소원이 응집된 의식세계까지 이 한 장의 돌에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


04.천전리 암각화 전경 ©울산광역시청 05.천전리 암각화 탁본

삼한~통일신라시대의 증인, 천전리 암각

천전리 암각화 역시 9×2.7m나 되는 주암면에 청동기시대 초기에 마주보고 애무하는 듯한 사슴 등의 동물이나 추상적인 인물, 중·후기에 원·타원형·마름모·가지 등의 모양이 암면 상중부에 가득 새겨져 있다. 이 문양들은 합종연횡으로 가로나 세로로 집단을 이루어 마치 글자가 모여 이루는 문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라에는 한문이 들어오기 전에 사용하던 초기문자가 있어 서로 의사소통했다는 내용이 중국의 역사서 『진서』나 『양서』에 기재되어 있는데, 천전리의 기하학적 문양들은 청동기시대에 발생한 초기문자일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이 문양·문자의 의미나 문장의 내용까지 연구될 날을 고대해 본다.


천전리 암각화의 하단에는 인물도·행렬도·동물도와 한문 명문 등이 선각들로 새겨져 있어 역사시대인 삼한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증인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특히 주명문과 추명문은 법흥대왕, 진흥대왕과 관련된 왕실의 공식적인 유행 기록이다. 이들의 유행을 기념하여 그린 행렬도는 법흥대왕의 동생 갈문왕 부부와 여동생, 법흥대왕 부인, 왕자 시절의 진흥대왕 등이 천전리 암각화 문자바위를 찾아 의식을 행했던 역사적 사실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이와 함께 영랑(永郎) 등 많은 화랑과 문무대왕의 왕자 시절 법민랑(法民郞), 동생 문왕랑, 흠순 등 삼국통일의 주역 왕과 왕족들, 그리고 수품(水品) 같은 고관, 안장(安藏)과 같은 고승들이 천전리 암각화 즉, 문암(文巖: 글자바위)을 유행하고 예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06.천전리 암각화 근경 ©울산광역시청 07.천전리 암각화의 주명문과 추명문

생동하는 문화이자 생생한 기록으로서 심대한 가치

이처럼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살아있는 우리의 생생한 역사이다. 대곡리 암각화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살아 생동하는 미술이자 문화이며, 당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생활상이자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천전리 암각화는 단군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청동기시대의 역사를 실감나게 기록한 문양·문자이며, 하단의 명문과 행렬도 등은 신라(통일신라 포함)의 문화이자 역사 자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가치는 실로 심대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국보 중의 국보를 길이 보존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글, 사진. 문명대(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울산 반구대 암각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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