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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밑바닥 없는 이 항아리 국보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작성일
2023-06-2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81

밑바닥 없는 이 항아리 국보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문양과 기법을 통해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이 항아리는, 문양을 빼곡하게 채워 공들여 만들었지만 왜 바닥이 없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고려 상감(象嵌) 청자가 비색(翡色) 청자보다 쇠퇴한 도자기라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연구의 진전과 새로운 유물, 유적의 발견으로 지금은 상감 청자가 비색 청자와 시기가 겹친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항아리도 앞으로 연구가 진전되면 그 바닥이 없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이미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가치가 인정된 유물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다시 살펴보고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00.국보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바닥 부분

이 항아리는 왜 바닥이 뚫렸을까

국보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는 표면에 둘러진 복잡하고 다양한 문양들보다 좀 더 시선을 잡아끄는 부분이 있다. 바로 휑하니 뚫려 있는 바닥이다. 무엇보다 뚫린 바닥이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처음부터 바닥이 없었을까? 아니면 만들어졌을 때는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바닥이 뚫린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은 잠시 접어두고, 도자기 자체를 한번 살펴보자. 우선 이 도자기의 이름부터 살펴본다.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인데, 순서대로 ‘분청사기’는 도자기의 제작법, ‘상감운룡문’은 대표적인 문양, ‘항아리’는 도자기의 모양을 나타낸다. 우리가 도자기 제작법으로 흔히 접하는 백자나 청자라는 이름은 사실 옛날 기록에도 나오는 이름이다. 옛날에도 청자, 백자라고 불렸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분청사기(粉靑沙器), 정확히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미술사학자였던 고유섭 선생님이 새로 만들어낸 단어다. 그릇 표면에 흰색 흙(백토)을 칠하고 회청색을 띤 사기라는 뜻이다. 역사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새로 지어도 상관없겠지만, 청자 계열이면서도 백자와 같이 보이기 위해 백토를 칠했다는 특징을 잘 나타내는 이름이기 때문에 계속 분청사기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무슨 문양을 새긴 걸까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를 보면 주둥이부터 굽까지, 빈 공간 없이 빽빽하게 문양을 넣은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주둥이 부분은 보이지 않는 안쪽까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주둥이 부분에 하얀 점 같은 것이 촘촘히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사실 국화무늬로, 하나하나 새긴 것이 아니고 도장 같은 도구에 무늬를 파서 찍어낸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런 방식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 항아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단서를 주고 있다. 이 국화무늬는 주둥이뿐 아니라 조금 내려와서 어깨와 몸통 부분의 여백을 빼곡히 채우고 있기도 하다.


그다음으로는 어깨 바로 위에 띠를 두른 당초무늬이다. 이 당초무늬는 중앙과 하단에도 나타난다. 한자로는 당초문(唐草文)이라고 하며, 덩굴 모양을 가리키는 말로, 넝쿨무늬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청자, 분청사기, 조선백자에서 모두 자주 쓰이는 문양으로, 특히 고려청자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 항아리처럼 주로 띠 모양으로 나타내는데, 모란·연꽃·국화 등 다른 꽃문양과 연결 시켜 모란당초무늬, 연화당초무늬 식으로 사용된다. 이 항아리에서는 띠처럼 사용해서 문양들을 구분하는 역할도 있다.


그 밑, 어깨 부분에는 여의두무늬를 둘렀다. 여의두는 글자 그대로 여의의 머리라는 뜻인데, 여의는 스님이 불경을 외거나 설법을 할 때 지니는 도구이다. 모양은 효자손같이 생긴 막대기 끝에 구름 같은 모양이 붙은 모습이다. 두껍게 표현된 여의두무늬는 그 윤곽선을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중으로 표현하고 문양 안쪽에는 다시 흰색으로 물결무늬를 찍은 뒤에 가운데에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여의두무늬의 바깥쪽은 여백으로 두지 않고, 주둥이 부분과 같은 국화무늬를 도장 같은 도구로 찍어내어 채웠다. 빈틈이 없도록 꼼꼼하게 채워 넣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밑을 보면, 여의두무늬와 국화무늬 밑에 다시 당초무늬를 둘러서 구분한 뒤, 이 항아리의 주문양이라고 할 수 있는 용을 그려 넣었다. 구름 사이를 날고 있는 용은 두 마리로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멋지거나 위엄 있다기보다는 조금 익살스럽게 표현된 용이지만 그 비늘을 빈틈없이 꼼꼼하게 새겨 넣었고, 갈기나 다리의 동작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다. 용들은 왼쪽의 여의주를 쫓아가는 모양인데 주변의 구름무늬 또한 멈춰 있는 구름이 아니라 흐르고 있는 구름을 나타내고 있다. 구름과 용 밑에는 다시 당초무늬를 두르고, 그 밑에는 네모난 모양의 연판(蓮瓣)무늬를 새겨 넣었다. 연판은 연꽃잎이라는 뜻으로 연꽃잎은 어깨 쪽의 여의두무늬와 같이, 검은색과 흰색의 선으로 모양을 나타내고, 그 내부에는 다시 꽃 모양을 새겨 넣어 꼼꼼하게 마무리했다.


01.국보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15세기 전반, 높이 49.7㎝, 입지름 15㎝, 밑지름 21.2㎝ ©국립중앙박물관

언제, 누가 만들어 쓰던 항아리일까

그럼 이 항아리는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우선 청자가 아니라 백토를 바른 분청사기라는 점에서 조선 초기로 볼 수 있다. 또한 도장 같은 도구로 찍어낸 국화무늬를 항아리 전체에 빽빽하게 채워 넣은 방식은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에서 많이 나타난다. 다른 분청사기 유물, 가마터의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참고하면 세부적으로는 15세기의 전반기,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항아리를 만들고 사용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항아리가 만들어졌던 시기는 조선 초기로, 당시에는 돈이 아닌 현물, 즉 물건으로 세금을 걷었으며, 분청사기와 같은 도자기도 그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세금으로 걷힌 도자기는 주로 왕실이나 관청에서 사용되었다. 물론 민간에서도 도자기를 사용하였고, 특히 세금으로 바치는 품질 좋은 도자기를 찾는 사람이 많아서 관청에 세금으로 바쳐진 도자기가 없어지기 일쑤였다. 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이 도자기가 어디 관청의 소유인지를 표시하기 위해 부처의 이름을 도자기에 새기게 된다.


하지만 관청의 이름은 도자기의 바닥에 새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 항아리의 경우 바닥이 통째로 없기 때문에 명확한 시기를 추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다른 사례로 보아, 이 항아리가 가지고 있는 특징, 즉 백토를 바른 분청사기로서, 고려청자의 흐름을 잇는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도장 같은 도구를 사용한 국화무늬와 상감을 이용한 용 문양 등이 빼곡하게 새겨진 점을 감안하면 왕실이나 관청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항아리를 만든 사람들은 도자기를 만드는 전문적인 장인들이라고 추측할 수 있으며, 사용한 사람들도 정부의 관료나 왕실 사람들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럼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서, 이 항아리의 바닥은 어떻게 된 걸까? 아주 맥 빠지는 이야기지만,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항아리에 정교하게 문양을 그리고, 주둥이 부분을 수리한 것을 보면 정성 들여 만들어 귀중하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므로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바닥이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이 들 뿐이다.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설명될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한다.




글. 박형빈(국립문화재연구원 미술문화재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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