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오백년을 지속한 디자인, 조선왕릉의 정자각
작성일
2023-06-2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17

오백년을 지속한 디자인, 조선왕릉의 정자각 조선왕릉에는 봉분이 있는 능침뿐 아니라 제향과 관리를 위한 여러 건축물도 존재하는데, 조선왕릉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물은 단연 정자각(丁字閣)이다. 왕릉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 조상의 신령과 살아있는 인간이 만나는 의식인 제향이 거행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왕의 시신을 모신 봉분과 의례의 중심인 정자각, 제향공간으로 들어서는 관문인 홍살문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조선왕릉의 축을 이룬다. 00.건원릉 정자각

제향을 위해 구성된 건물, 정자각

정자각은 평면이 ‘丁(정)’자처럼 생겼기 때문에 정자각이라 부른다. 남쪽을 향해 가로로 놓인 부분이 정전(正殿)이고, 정전의 중앙에 연결되어 세로로 놓인 부분이 배위청(拜位廳)이다. 정전은 능침에서 내려온 신령의 자리인 신어평상(神御平床)과 제상을 두는 곳이다. 정전 후면 가운데 칸의 문은 능침에서부터 신령이 드나드는 북신문(北神門)이고, 정전 정면 세 칸의 문은 제향 때 각기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 배위청은 벽 없이 기둥만 세웠는데, 제향에 올리는 술을 따르는 준소(樽所)가 놓이고 제관들이 움직이는 공간이다. 정전과 배위청은 월대 위에 놓인다.


월대 동쪽에는 제향 때 향(香)과 축문(祝文)을 들고 오르는 향로계(香路階)와 제관들이 오르내리는 동계(東階), 이렇게 두 개의 계단이 있고, 월대 서쪽에는 수라간에서 준비한 제물을 진설할 때와 제향이 끝나고 축문을 태우러 예감으로 갈 때 사용하는 서계(西階)가 있다. 건물의 격식을 위해 정자각 지붕의 용마루에는 하얗게 회를 발라 마무리했고, 용마루 양 끝에는 용두(龍頭)를, 내림마루 위에는 잡상을 설치하였다. ‘구조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처럼 정자각은 철저하게 제향을 위해 구성된 건물이다. 이 구조는 조선 1대 태조의 건원릉에서부터 시작되어 대한제국 황제릉으로 능 제도가 바뀌기 전까지 오백여 년간 일관되게 이어져 왔다.


황제릉인 홍릉(洪陵)과 유릉을 제외하고 능마다 하나씩 총 38개 정자각이 대한민국에 있다. 조선왕릉의 정자각들이 긴 세월 일관된 디자인을 유지해 왔다고 해서 모두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기능상 필요한 구조는 유지하면서도 세월이 흐르며 조금씩 변화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주목할 만한 특징을 가진 정자각들을 몇 개 살펴보고자 한다.


01.목릉 정자각 02.다포양식으로 지은 목릉 정자각 03.숭릉 정자각 ©서헌강

간결한 품위를 보여주는 ‘건원릉 정자각’

구리 동구릉에 있는 태조의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 8년(1408)에 조성되었다. 정전 3칸, 배위청 2칸, 총 5칸 규모로 지어졌고, 이후 여러 번의 수리를 거쳤는데 특히 영조 40년(1764) 중수청을 설치하여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1대 국왕의 정자각이라는 상징성과 조선왕릉 정자각의 표준이라는 중요성 때문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단정한 맞배지붕을 올린 5칸 정자각은 작지만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결성 있는 간결한 품위를 보여준다.


5칸 정자각은 한동안 지속되다가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을 조성할 때 정전을 양 옆으로 한 칸씩 늘리고 배위청도 한 칸 늘려 총 8칸으로 정자각을 지었다. 8칸 정자각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계속 만들어졌으나 보수를 거치면서 이들 중 건립 당시의 규모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정자각은 없다.


장중한 ‘목릉 정자각’, 특별한 ‘숭릉 정자각’

역시 동구릉에 위치한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목릉 정자각도 보물이다. 처음 선조의 목릉은 현재 동구릉 내 경릉(헌종의 능) 자리에 있었는데, 인조 8년(1630) 현재의 위치로 선조 능을 옮겨오면서 1608년(광해군 즉위년) 지었던 정자각을 옮겨온 것이다. 정전 3칸, 배위청 2칸의 전형적인 구조라 언뜻 보아서는 건원릉 정자각과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목릉 정자각은 건축방식에서 특별하여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다포양식은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건물 기둥 위에 짜 올리는 구조물인 포(包)를 기둥 위에만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도 짜 올리는 건축방식을 말한다. 목조건축 양식 중에서 가장 장중하고 복잡한 구조로, 그만큼 목릉의 정자각은 건물의 위엄을 높이는 방식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구릉 내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3칸 정전의 양 옆에 기둥만으로 된 익각 한 칸씩을 덧붙이고 배위청도 한 칸 늘려 총 8칸 규모로 짓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지붕의 각 모서리에서 여섯 방향으로 날렵하게 뻗은 추녀마루 덕에 다른 정자각에 비해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렇게 정자각 규모를 늘려 짓게 된 것은 왕릉 조성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기존에는 돌아가신 왕의 재궁(관)을 능으로 모셔 와 매장하기 전까지 잠시 모셔두고 흉례의식을 치르기 위해 영악전이라는 임시 건물을 짓고, 왕릉 조성 이후에 길례인 제향의식을 지낼 정자각도 따로 지었었는데, 비용 절감을 위해 임시로 쓰는 영악전을 짓지 않고 정자각이 그 역할을 잠시 대신하게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정자각 정전은 찬궁(재궁을 담아두는 방)을 배설하기 위해 기둥간격을 넓히고 칸 수도 늘려 짓게 되었다.


흉례와 길례의 공간을 합리적으로 통합한 숭릉의 8칸 정자각은 전례가 되어 영조가 『국조상례보편』(1758)을 편찬할 때까지 이어졌다. 숙종의 첫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인 의릉 등에서 8칸 제도이면서 맞배지붕을 얹은 정자각을 볼 수 있다.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은 오래가며 아름답다. 500년을 버틴 독특한 구조의 정자각은 규모는 작지만 왕을 위한 제향공간으로서 격을 높여 위엄 있게 치장하여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답게 눈길을 끈다. 또 정자각 월대 위로 올라가 배위청 기둥과 지붕 아래 단청을 프레임 삼아 바라보는 왕릉의 경관은 한층 더 고요하고 경건하다.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씩 다른 개성을 가진 정자각들을 찾아다니며 비교해 보는 것도 조선왕릉을 방문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글. 이홍주(궁능유적본부 학예연구사)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