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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문화재의 뒤안길(111)-벽란도 가는 길(서울경제, '21.11.1)
작성자
진호신
게재일
2021-11-01
주관부서
대변인실
조회수
327

문화재의 뒤안길(111) 서울경제 ('21.11.1)



벽란도(碧瀾渡) 가는 길

 

고려의 국제 무역항...송나라 상인 뱃길 확인


글/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진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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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상인들이 고려의 예성항 벽란도에 들어올 때 육지보다는 대량 운송이 가능한 흑산도 남쪽 바다에서 올라오는 뱃길을 선호하였다.

‘벽란도’는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에 가까운 예성항 인근에 외국 사신을 위한 객관(客館) 벽란정(碧瀾亭)에서 유래하였다.

매년 6월, 7월 중국 양자강 남쪽 밍저우(明州, 寧波의 옛 이름)에서 남풍과 해류를 타고 약 20일 정도면 고려의 예성항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이들 상인들이 이용한 배는 중국 남방지역의 객주라는 선박이었는데, 규모는 약 200톤급으로 길이는 30m, 승선인원은 60명 정도였다.

송대의 배는 나침반의 발명과 조선술의 발달로 풍랑에도 잘 견디고 계절풍을 이용하여 빠른 항해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사서에 나타난 이들 송나라 상인들은 1012~1301년까지 총 135건에 4,976명이 왔으나,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상인들이 예성항에 도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024년 9월에는 아라비아의 열라자(悅羅慈) 등 1백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고, 다음해 9월에도 ‘하선(夏詵)ㆍ라자(羅慈) 등 1백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고 한다. 일본, 여진(女眞)에서도 사신들이 예성항에 도착하여 토산물을 바쳤으며, 팔관회(八關會) 행사에도 참가하였다고 한다. 바야흐로 고려시대 예성항은 외국인이 북적대는 국제적 항구였던 것이다. 

 

송나라 뱃사람들은 예기치 못한 해난사고에 대비하여야 했다.

바람에 의한 사고로는 암초에 충돌하는 침몰 사고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뱃길 요소요소에는 무사항해를 기원해 주는 사찰이 많았다.

흑산도에는 무심사(无心寺), 서해안 허사도·부남군도 인근에는 양원사(養源寺), 군산 선유도에는 자복사·오룡묘(資福寺·五龍廟), 영종도에는 제물사(濟物寺), 강화도 용당돈대(龍堂墩臺) 인근에는 합굴용사(蛤窟龍祠)가 있었다고 하니, 뱃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을 사찰이나 제당에 의지하여 위험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을 잘 알 수 있다.

송나라 상인이나 사신단의 고려 예성항 벽란도에 이르는 뱃길이 어떠한 루트였는가에 대한 많은 추정이 많았다. 첫째는 영종도-석모도-교동도-예성항 루트이고, 둘째는 영종도-손돌목-연미정-승천포-예성항 루트이다.

최근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타난 합굴용사(蛤窟龍祠) 위치가 밝혀짐으로써 송나라 상인들이나 사신단이 이용했던 바닷길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송나라 상인이나 사신단은 영종도 경원정(慶源亭)에서 숙박을 하고 물살이 험하고 무협(巫峽)과 같은 강화도 손돌목을 지나 강화도 용당돈대 인근 합굴용사(蛤窟龍祠)에서 무사항해를 기원하였으며, 지금의 연미정(燕尾亭)이 위치한 강화도 북단 분수령(分水領)을 지나 강화 평화전망대 인근에서 물때를 기다리며 예성항에 입항하였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지만 남과 북이 벽란도에서 서로 만나 과거의 영화를 재현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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