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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약, 독자적인 발전사
작성일
2011-08-1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8428

 

최근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한의학계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경사로서, 중국의 중의학(中醫學, Traditional Chinese Medicine)과는 다른 한의학(韓醫學, Oriental medicine; Traditional Korean Medicine)의 문화적, 의학적 그리고 과학적인 능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약의 발전에 대하여,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완성한 향약(鄕藥, 우리나라 고유 약재를 이름)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향약의 태동기
여러 연구 보고서들에 의하면 중국의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약 6세기 삼국시대라고 추정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는 자료가 거의 없어 중국 서적을 중심으로 고려나 신라라는 기재가 있는 것을 토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나오는 약재는 11종인데 대체로 인삼人蔘, 오미자五味子, 곤포(昆布, 다시마), 관동화(款冬花, 나물로도 먹는 머위의 꽃봉오리를 말린 것.), 백부자(白附子, 노랑돌쩌귀라도고 하며 풀밭이나 관목 숲에서 자란다.) 등이 있다. 이러한 기술은 모두 고구려나 백제에서 생산되는 것들이며, 우수한 약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의서들이 발간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 <고려노사방高麗老師方>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존재하지 않아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지만, 보고서들에 의하면 삼국의 의학은 질병치료에 있어 1개의 단일 약재 혹은 2~3개의 약재로 치료하는 민간의술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 신라산 약재로 중국 및 일본의 문헌에 소개된 것으로는, 삼국시대의 약재 11종과 더불어 토과(土瓜, 박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초본식물로 폐를 촉촉하게 하고 기침을 멎게 한다.) 박하(薄荷, 치약, 잼, 사탕, 화장품 등 청량제나 향료로 쓰이는 식물로, 진통제, 건위제, 구충제 등에 약용한다.), 국菊, 가자茄子, 도桃, 위령선威靈仙,  형개荊芥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서역의 약재들이 수입되어페르시아, 인도, 아라비아 등에서 여러 약재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기록들은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토속 약재들의 우수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는 근거로써 향후 향약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

 

 

고려시대, 향약의 발전기
고려시대에는 당의 영향을 받은 신라의 의학을 수용하면서, 불교에 수반된 인도 의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 송나라나 서역과의 교류로 차차 의학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되어 남방 및 서역 지식을 융합하게 되면서, 고려의학은 점차로 자주적인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고려 후반기에는 중국을 장악한 원나라의 문화와 접촉하게 되지만 원의 의학적 지식에 대한 수용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자주적인 움직임이 발생하였는데, 의약학 분야에서는 국내에 없는 약재들을 수입에 의존하다가 자생하는 약초로 대체ㆍ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이때 향약이라는 명칭이 나오게 되는데, 향약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약초를 일컬으며, 중국에서 수입되는 약인 당약唐藥과 상대되는 명칭이다. 향약은 우리나라의 풍토에 알맞은 약재로서, 고려시대 후기에 이를 이용하여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약 자립의 기운이 싹트게 되었다. 그 결과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간행하게 되어, 고려중기의 당?송의학적 지식을 기초로 우리 풍습에 적응한 독자적인 의술을 발휘할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고려 말경에 이르러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향약고방鄕藥古方>을 비롯한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 등 수종의 향약방서들이 출현하게 된다.  

 

조선 전기, 향약의 완숙기
고려시대의 자주적인 의약정책 및 의료 제도의 분위기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특히 세종 때 자기나라의 풍토風土에 적합한 자국산 약재가 더 효과적이라는 병病과 약藥에 대한 의토성(宜土性, ‘사람의 몸과 풍토는 각각 둘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다른 말로 신토불이身土不二라 표현하기도 한다.)이 강조되었다. 정책적으로는 의약제민醫藥濟民의 자주적인 방책을 세우면서 향약의 진가를 감별하는 방법으로 전문가들을 국외에 파견하여 그 지식을 넓히게 했으며, 각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향약들의 실태를 조사하였다. 각 지방의 향약 채취의 시기를 적절히 하고 좋은 약재를 획득하기 위하여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을 간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약재 채취시기를 반드시 적합하게 해야 한약의 효과를 제대로 기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관리 감독 또한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 수차례 중요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약재에 대하여 현재로 말하면 농촌진흥청과 기능이 같은 기관에서 시험재배나 재배 지도를 한 기록이 있다. 즉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향약의 재배와 같은 농업 기술의 민간 보급을 포함한 약재의 관리를 직접 맡아서 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당시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향약으로는, 백화사百花蛇, 오사烏蛇 등 뱀과 같은 동물성 약재들과 연자(蓮子, 연꽃씨), 복분자覆盆子, 감초甘草, 상기생桑寄生, 우황牛黃, 인삼人蔘, 인진(茵蔯, 사철쑥), 대조(大棗, 대추), 음양곽(淫羊藿, 삼지구엽초) 등 총 62종이 있었다.

 

또한 고려 후반기부터 시작된 향약을 집대성하고, 중국의 의방서들을 정리하여 <약제생집성방藥濟生集成方> 30권을 간행하였다. 이 서적은 자국풍토에서 생산되는 약재로써, 자국민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효력을 더 빨리 얻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약재를 구하는 것보다 편리하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서문에 ‘민간의 노인이 한 가지 풀로 병을 치료하는데 그 효과가 매우 신기하다’ 말하고 있는데, 이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지어지는 시기에도 민간에서는 주위에 자생하는 약초를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해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민간의 경험들이 여러 의서에서도 엿보인다.

 

 

조선후기, 향약 발전 최고봉 동의보감
조선후기 양란 이후에 우리나라는 약재가 매우 귀하여 아예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우리나라에 없는 약재들은 중국산을 비싼 값에 수입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들여온 약재들은 저장 유통 과정 중에 상하는 경우가 많아 효과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도 구하기 힘들어 왕의 치료를 위해 보관하였던 진귀한 약재나 우황청심원牛黃淸心元 같은 약을 왕이 신하에게 하사한 내용도 많다. 일반 서민들의 고통은 이보다 더 심하여 병이 나도 쉽게 고칠 수가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적으로는 양란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국가적 의료 정책이 시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1695년 선조는 태의(太醫, 궁궐 안에서 임금이나 그 일족의 병을 치료하던 의원)인 허준에게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일찍 죽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약초가 많이 나기는 하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라고 명을 내렸고, 허준은 동의보감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동의보감은 고조선 이래의 자주의학과 고려의 향약을 계승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 우리의 자주적인 고유의학의 발자취와 함께 삼국시대부터 도입된 중국의학을 연구한 것이다. 동의보감은 실제 질병을 치료하는 내용이 수록된 내경, 외형, 잡병편 이외에 탕액편 3권을 따로 집필하여 약물에 대한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수록하였다. 탕액편의 특징은 당약재(중국약재)와 향약재를 구별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수입된 당약재는 당唐이라고 표기하고 향약재의 경우는 향명鄕名을 부기하였다. 향약재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재배 또는 채취되고 있다는 뜻이며, 당약재가 없는 경우 대용의 의미도 있다.


이렇듯 삼국시대에 태동한 향약의 기운은 고려시대에 발전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빛을 발하다가 동의보감에 와서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는 선조들의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향약의 지혜를 온 국민과 인류의 건강을 위해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글ㆍ부영민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교수   사진ㆍ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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