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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문화재의 뒤안길(105)-조각승 양지(서울경제, '21.8.30)
작성자
김동하
게재일
2021-08-30
주관부서
대변인실
조회수
1163

문화재의 뒤안길(105) (서울경제, '21.8.30)



신라의 예술 장인, 조각승 양지  

글/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문화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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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대표 예술가를 꼽자면 서예가 김생, 화가 솔거, 음악(거문고) 백결, 그리고 조각가 양지가 있다. 『삼국유사』의 <양지사석>에는 신통력과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신라의 승려 양지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양지사석> 첫 구절은 “스님의 조상이나 고향을 알 수 없다.”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시작이 매우 흥미롭다. 더욱이 이 기록 때문에 그동안 관련학계에서는 스님의 국적이나 신분과 관련한 다양한 이견이 있기도 했다. 한편 다수의 연구자들은 양지스님이 선덕여왕~문무왕 때까지 신라 왕경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예술가이자 승려였다고는 인정한다.

조상도, 고향도 알려지지 않은 한 승려가 13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많은 이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걸출한 예술세계와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우수한 불상 때문이다. <양지사석>에는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및 전탑의 기와,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금강신상, 사천왕사의 탑 아래 팔부신장상 등 약 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에서부터 20~30㎝의 작은 기와까지 모두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기록한다. 다만 기록에 남아 있는 불상 대부분이 살아졌고, 사천왕사 목탑 기단에서 발굴된 신장상(삼국유사 기록 속 사천왕사 탑아래 팔부신장)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양지스님의 대작(大作)들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스님의 예술세계와 큰 뜻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양지사석>에는 양지스님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영묘사의 불상을 만들 때 도성 안의 남녀가 함께 불상의 재료인 진흙을 날랐다고 한다. 그 때 부르던 노래가 향가로 전하는데,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풍요’라는 향가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경주 사람들은 방아를 찧거나 다른 일을 할 때도 줄곧 이 노래를 불러왔다고 하는데, 이 역시 양지스님의 행적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스님은 양지스님을 “스님은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족했으나, 큰 인물[大方]로서 하찮은 재주에 숨었던 분”이라며 극찬을 하면서도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6~2012년까지 7차에 걸쳐 사천왕사 터를 조사했다. 발굴을 통해 금당, 동서목탑, 회랑, 비각, 석교 등 사천왕사 내 중요한 건축물의 흔적을 확인했고, 기와, 토기, 불상 등 다양한 불교문화재를 발굴했다. 특히 목탑 기단 면에 배치된 녹유신장벽전을 발굴하고, 벽전의 위치와 배치를 확인한 것은 발굴조사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연구소는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벽전의 조각을 모두 수습하여 인문학적 조사와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보존처리해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한 쌍(A, B, C형)을 복원했다. 그리고 2015년·2018년에는 이러한 조사·연구 성과를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특별전시를 개최했다.

최근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협력하여 사천왕사 목탑 기단의 정비·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사업의 가장 핵심은 연구소가 복원한 양지스님의 작품인 녹유신장벽전을 재현하여 사천왕사지 현장에 설치하는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신라시대 양지스님의 작품이 2021년 사천왕사 목탑지에 다시 설치되는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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