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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칼럼·기고

제목
조선왕실의 취향⑭- 현종과 태종(한국일보, 20.3.21)
작성자
신재근
게재일
2020-03-21
주관부서
대변인실
조회수
75

조선왕실의 취향⑭- 현종과 태종 (한국일보, 20.3.21)

 

종기 치료한다 했건만 … 태종이 온천행을 포기한 까닭은

 

글/ 신재근 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1. 온궁영괴대도.jpg
온궁영괴대도(溫宮靈槐臺圖).

온양행궁과 영괴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내정전과 외정전 사이에 온천이 있다.

그림 아래쪽에는 영괴대의 내력을 적은 비문이 옮겨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요즘 우리 사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질병 관리는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질병과 그 치료 문제는 시대를 막론하고 최우선 순위의 사회적 관심사였을 것이다. 지금보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통 사회에서는 더 어려운 고민거리였을 것이며, 특히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왕의 건강 관리와 관련해서는 첨예한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1665년 눈병(안질)과 피부 부스럼(습창)으로 고생하고 있던 현종에게 왕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온천욕을 통한 치료가 불가피함을 아뢴다. 다른 의약적 처방보다도 온천이 효과가 있다고 본 것이다. 왕이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그 치료에 온천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현종은 온천행을 결정했다.

 

온천욕은 비록 의서에 나와 있는 치료법은 아니지만, 경험적으로 그 효험에 대한 신뢰가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에는 현종 이외에도 태조, 세종, 세조, 숙종, 영조 등 여러 왕들이 온천을 다녀왔고, 중전을 비롯한 왕실 인물들의 온천 행차 역시 적지 않았다. 온천과 질병 치료의 상관관계를 오늘날의 잣대로 들여다보기는 어렵겠지만 온천에 다녀오고 나서 앓던 병이 깔끔하게 나았다는 기록도 전해지는 것을 보면 온천의 치료 효과에 대한 신뢰는 꽤 두터웠던 것 같다.

 

물론 온천의 치료 효과에 대한 신뢰와는 별개로 왕이 궁궐을 나서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한양에서 비교적 가까운 온천에 다녀온다고 해도 한동안 궁궐을 비워야 했고 왕의 행차를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이 함께 움직여야 했다. 정치적ㆍ사회적ㆍ경제적 ‘비용’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왕의 질병 치료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사실 왕의 온천 행차에는 이러저러한 속사정들이 있었다.

 

2. 세 그루의 회화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영괴대의 옛 모습.jpg

세 그루의 회화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영괴대의 옛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402년 태종은 종기 치료를 위해 온천에 다녀오고자 하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온다. 반대의 이유인즉슨,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 왕의 나이가 젊어 병환이 없을 것이 틀림없고, 온천 치료를 핑계 삼아 사냥이나 즐기려 했던 것으로 생각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추수철이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가 덧붙여졌다.

 

30대 중반의 나이였던 태종은 억울했던 모양이다. 사냥을 하고자 했다면 굳이 온천 치료의 이름을 빌릴 필요가 없다고 항변하면서 20, 30대의 젊은 사람은 반드시 병이 없는가라고 반문하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온천에 가고자 하는 뜻을 접었다.

 

왕의 온천행을 반대하기 위한 상소였으므로 점잖게 에둘러 표현한 것이겠으나 이 일화는 당시 왕의 온천행을 바라보는 시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온천욕을 통한 질병 치료라는 중요한 이유가 있지만, 궁궐 밖으로 행차하여 사냥과 같은 바깥 활동을 하며 산천을 즐길 수 있는 유흥의 성격도 함께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왕의 온천행은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었다. 해당 지역에서는 왕을 영접하기 위해 많은 인력과 자원이 동원되어야 했다. 왕에게 즐길 거리를 선사하려 했고, 보양을 위해 지역의 좋은 먹거리를 대접하고자 했다. 어느 정도는 지역 관리들이 스스로 나서서 경쟁적으로 벌인 일이었겠지만 이러한 영접을 위한 부담은 고스란히 해당 지역 백성들의 몫이었다.

온천을 더 자주, 적은 부담으로 즐길 수 있으려면 한양에서 보다 가까운 곳에 온천이 있어야 했다.

세종 때에는 포상을 내걸고 경기 지역에서 온천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신고한 사람 개인에게 후한 상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해당 지역의 칭호를 승격시키겠다고까지 하였다. 아울러 그 온천의 효험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포상을 달리할 정도로 구체적인 ‘당근’이 제시되었다. 이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온천이 있는데도 신고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부평부(富平府)에 온천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역민들이 그 구체적인 소재지를 숨기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온천 소재지를 숨기면 고을의 명칭을 깎아내려 그 죄를 묻겠다고 하는 ‘채찍’을 들기도 하였으나 결국 온천은 찾지 못했다. 부평은 부(府)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실제로 부평에 온천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해당 지역에서 신고하지 않는다는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이는 온천이 발견될 경우 지역민이 겪는 어려움이 그만큼 컸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부평부는 지금의 인천광역시와 부천시에 해당되는 지역이니 만약에 온천이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왕의 온천행으로 인한 ‘비용’이 크게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왕실 인물들이 이용했던 온천은 황해도 평산, 경기도 이천, 충청도의 온양 등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평산이나 이천 등으로 향했지만, 점차 온양 쪽이 선호되었다.

 

현종은 “평산은 온천이 너무 뜨겁고 이천은 길이 험하다”는 이유를 들어 목적지를 온양으로 결정했다. 온천을 선택하는 기준에 온천수가 어떠한가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교통 여건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특히 왕의 행차에는 많은 인원이 함께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잘 닦여진 길이 필요했다.

 

3. 온양관광호텔 본관 앞 영괴대비와 비각.JPG

충남 아산의 온양관광호텔 본관 앞에 있는 영괴대비와 비각.

신재근 학예연구사 제공


한양에서의 접근성이 가장 좋았던 온양 온천은 현종 이후에도 숙종과 영조가 차례로 다녀갔다. 영조 이후에 왕이 온양 온천을 방문한 적은 없으나 영조의 아들이자 비극적인 운명으로 잘 알려진 사도세자도 1760년 온양 온천을 다녀온 적이 있다.

사도세자의 온양 온천 방문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그 기억을 이어주는 기념물이 남게 되었다. 그는 온양에서 온천욕과 함께 활 쏘기 등으로 시간을 보냈었는데 활터에 그늘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게 하였다. 30여년의 시간이 흘러 나무는 무성하게 자랐고 1795년에는 그 주위에 축대를 쌓아 올리며 정비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이 일을 보고받은 후 이러한 내력과 함께 ‘영괴대( 槐臺)’라는 이름을 적은 비를 나무 옆에 세웠다. 영괴대는 ‘신령스러운 회화나무가 심어진 사대(射臺)’라는 뜻으로 사도세자의 덕을 기리는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온양 온천에는 왕이 임시로 머무르는 궁궐이 있었다.

온양행궁 또는 줄여서 온궁이라고도 하는데 영괴대가 조성되고 나서 이곳 온궁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전해지고 있다. 온궁 중앙에 내정전(內正殿), 외정전(外正殿)이 표시되어 있고, 그 사이에 온천(溫泉)이라고 쓰인 건물이 보인다.

주변에는 홍문관(弘文館), 수문장청(守門將廳) 등의 관청 이름도 찾을 수 있다. 좌측 상단에는 무성하게 자란 세 그루의 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영괴대이다. 담장 바깥으로는 과녁이 그려져 있어서 영괴대가 활을 쏘던 장소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쉽게도 온양행궁의 자취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 자리에는 온양관광호텔이 들어서 있다. 옛 궁궐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호텔 본관 앞 한 편에 ‘영괴대’라고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다. 1795년 정조가 세운 바로 그 비석이다.

이를 통해 그 언저리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가 자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온천과 함께 활 쏘기 등으로 여흥을 즐겼을 사도세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정도로 옛 정취를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온양 온천은 조선의 왕들이 애용했던 온천이라는 영예에 힘입어 오늘날까지도 전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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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괴대비는 1795년 정조가 세웠다. 신재근 학예연구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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