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사랑
- 제목
- 경성방송국 개국의 역사와 의미
- 작성일
- 2011-03-10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8641
대한민국 첫 라디오 방송국의 개국
우리나라의 1927년 라디오 방송국 개국은 1920년 방송을 시작한 미국과 비교하면 7년 정도 격차가 난다. 호출 부호는 JODK, 호출 명칭은 경성방송국, 주파수 690㎑, 출력 1㎾였다. 방송 장비로는 영국 마프코니사가 제작한 6Q형 방송송신기와 15㎾급 변압기 4개, 14㎾급 충전용 전동발전기 3대, 6㎾급 송신기용 전동 교류발전기 2대 등이었다. 호출 부호 즉‘콜 사인’JODK는 JO가 일본 고유의 콜사인이고 DK가‘일본의 네 번째 방송국 (도쿄 AK, 오사카 BK, 나고야 CK)’을 뜻한다.
일본은 1925년 3월 22일 도쿄방송국, 7월 15일 나고야방송국, 그리고 이듬해 12월 1일 오사카방송국까지 3개 방송국을 연이어 개국했다. 3개 방송국 개국은 당시 일본 3대 도시에 장거리 방송 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운영 주체 모두 공익 법인 형태라는 조건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다. 공통점은 자본을 낸 출자자가 민간인이었고 외형적으로는 민영이었지만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사실상 관영 방송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 방송이 갖는 특별한 영향력을 예측하지 못 했다. 하지만‘관동대지진’사건으로 방송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이후 이른바‘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폭동’등 집단행동을 통제할 수단으로 방송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경성방송국의 탄생은 이를테면 관동대지진으로 체감했던 도쿄방송국의 효용성을 한반도 식민지 경영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속셈에서 나왔던 것이다. 나중에 한국어 방송을 실시할 때조선총독부가 방송 방침으로 내건‘심전개발心田開發’이라는 목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는 어용 홍보기관으로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개조하려는 이른바‘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목적으로 경성방송국을 설립했다. 1927년에 개국했지만 사실 1924년부터 조선일보를 비롯한 11개 단체가 민간 방송 설립을 위해 서울 우미관에서 공개 시험방송을 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고, 경성방송국 개국 이후에도 여러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를 불허했다. 경성방송국은 사실상 일제 강점기 독점적인 지위를 누린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다.
열악한 방송 환경, 라디오 보급도 턱없이 부족
송출 당시 라디오 방송 환경은 열악했다. 당시 등록된 라디오가 1,440대에 불과했다. 이어 6개월 후인 8월까지 보급률이 3,684대 수준이었다. 그러나 관심은 높았다. 1927년 7월 4일 동아일보에는‘라듸오기器도적, 긔계 곳처준다고 도적질’기사가 날 정도로 수리공을 사칭한 라디오 도둑이 극성이었다. 라디오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보통 제품은 40원대. 고급품은 1,000원이 훌쩍 넘었다. 방송국 기술직 신입사원 월급이 2원이던 물가를 감안하면 라디오는 가히 부의 상징이었다. 청취료와 부속품을 교환하는 데 월 4원이 필요했다.
초기 프로그램은 뉴스, 음악, 소설 낭독 위주였다. 1930년대엔 라디오 드라마라는 새 장르가 인기를 끌었다. 방송 사고도 흔하게 일어났다. 경성방송국 개국 이듬해인 1928년, 꾀꼬리 울음으로 새해를 알리겠다는 기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세 마리 꾀꼬리가 침묵을 지켜 30분간 침묵 방송이 나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예능프로그램 주역인 기생들이 출연을 거부하는 사태도 종종 있었다. 당시 출연진의 절반을 차지했던 일본 기생의 출연료가 문제였다. 출연료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최대 난제는 운영 자금이었다. 청취자로부터 2원씩 징수하는 수신료로는 제작비를 감당 하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조선인 청취자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개국 초기 경성방송국은 오전 6시에서 오후 11시까지 하루 17시간 동안 일본어와 조선어 방송을 각각 7대 3 비율로 내보내는 기형적인 편성이었다. 당연히 조선인과 일본인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게다가 수신료 2원도 청취자 불만의 원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디오 보급률도 문제였다. 라디오 보급 대수가 늘어난 것은 조선방송협회가 1933년 4월부터 900㎑의 경성 제1방송(일본어)과 610㎑의 경성 제2방송(조선어)으로 분리하는 ‘2중 방송’을 진행하면서였다. 이를 위해 협회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서세교리(현 서울시 연희동)에 10㎾급 연희송신소를 세웠다.
1935년 경성방송국은 호출 명칭을 경성중앙방송국으로 바뀌었다. 이는 같은 해 개국한 부산방송국을 필두로 청진·평양(1936년), 이리(1937년), 함흥(1938년) 등 지방에 방송국이 잇달아 설치된데 따른 것이었다. 이후 대구, 광주, 대전, 목포, 원산, 혜주, 마산, 성진, 춘천, 제주 등 10개 도시에 지방 방송국이 추가로 개국했다. 보급된 라디오 대부분은 수도권 인근에서나 겨우 청취 할 수 있는 감도 수준의 광석 수신기였다. 그나마 고급 전지를 사용하는 고성능 진공관 방식은 서울 지역에서 극히 소수만 가지고 있었다.
경성방송국은 일본어와 조선어 2중 방송을 하면서 방송 자료의 절대 빈곤으로 곤혹을 치렀다. 당시 재방송용 자료로 사용됐던것은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레코드판뿐이었다. 경성방송국에 방송자료를 직접 녹음할 수 있는 녹음기가 도입된 시점도 1939년이었다. 이때 도입된 녹음기는 일본화학연구소가 제작한 명반석(Alumite) 원반을 이용해서 만든 기계식이었다. 1940년에는 일본자기 녹음연구소가 개발한 자기식 녹음기가 선을 보였다. 당시 자기식 녹음기는 녹음선 삭제를 통해 여러 번 반복 사용할 수 있는데다 녹음 즉시 재생이 가능한 혁신적인 발명품이었다.
2중 방송의 시작, 라디오 방송의 재조명
2중 방송 즉, 조선어 전용인 제2방송을 시작하면서 경성방송국은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청취자를 늘리기 위해 시도한 2중 방송은 적자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어와 조선어로 시간을 나누던 방송에서 조선어 채널을 별도 분리하면서 청취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1936년 8월 5만 9,000명, 1938년 11월 12만 3,000명으로 급증했다. 광복 전까지 주요 도시에 16개 방송국이 생겼다. 라디오 가격도 10원대로 크게 떨어졌다. 2중 방송 실시와 출력이 높아지면서 라디오 보급은 1937년 10만 대를 돌파했다.
라디오 보급이 늘면서 소련 등 다른 지역에서 송출하는 내용을 듣는 한국어 방송 청취자도 비례해 늘었다. 방송 내용은 일본군만행을 폭로하고 각처에서 일본군과 투쟁하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동 상황과 연합국의 대일 승전보 등이었다.투쟁 의지를 다졌다. 총독부는 해외에서 송출되는 한국어 방송을 차단하기 위해 1937년 1월 한국어 방송 출력을 50㎾로 증강하고 주파수를 변경했다.
1936년 이후 조선어 방송은 쇠락길을 걷는다. 일제가 선전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어 방송 비율을 늘렸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자 일본은 방송전파를 관제해 1942년 4월, 경성중앙방송국을 비롯한 전국 각 지방방송국에서 일제히 한국어 방송을 중단하고 일본어 단일방송 체제로 바꾸었다. 이어 이듬해인 1943년 11월 10일부터 다시 한국어 방송을 재개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9월 14일 주한미군사령부가 총독부로부터 일체의 행정권과 함께 경성중앙방송국 운영권도 넘겨받으면서 그날로 모든 공식 문서의 명칭이 경성에서 서울로 바뀌었고, 이때 경성중앙방송국도 서울중앙방송국으로 개칭됐다. 이것이 지금의 공영방송 KBS의 모체다.
글 | 사진 ·강병준 전자신문 전자담당 차장
사진·KBS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