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사랑
- 제목
- 여름이 한창일 때 언제 가도 좋은 북한강, 문화유산을 따라 - 북한강
- 작성일
- 2018-08-01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2386
곁에 있어 한결같은 북한강의 물줄기
강원도 금강군 옥발봉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며 소양강, 홍천강 등 주요 지천을 둔 북한강, 협곡이 많고 물이 많아 우리나라 제 1의 수력발전지대이면서 동시에 래프팅, 트레킹, 펜션 등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가평으로 떠나는 길은 어쩐지 낯이 익고 편안하다.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 가깝기도 하려니와 학생 때부터 최근까지 캠핑이니 MT니 해서 자주 다녔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농경박물관은 한 번도 가보지를 못했다. 어디를 가든 겉핥기식으로만 다니던 습관 때문이다. 이번에는 평소에 다니던 관광지를 뒤로하고 좀 다른 컨셉의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북한강을 따라 문화유산 탐방. 이름만 거창하지 결국은 한강 유람이다.
우리 농경의 역사를 만나는 현암농경유물박물관
현암농경유물박물관은 가평북중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이곳이 맞나 갸우뚱하기도 했다. 3층 건물에 꾸며진 농경박물관은 현암 윤영덕 선생이 기증한 생활소품과 농기구를 농사의 순서에 맞춰 전시한 것이다. 농기구만 159종, 229점이 전시되어 있다니 그 규모를 알 만하다. 민속관, 밭갈이관, 추수관, 가공품관 등 전시관 이름이 친숙하다.
전시품 면면을 살펴보니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것들도 있고 생경한 것들도 있다. 전통적으로 농경생활을 하던 민족의 후손임에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농기구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 이젠 이런 기구들을 박물관에서나 보게 되다니 시대의 변화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다듬잇돌과 방망이를 보니 정겹던 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주판을 보니 손으로 주판알을 튕기던 옛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이런 식으로나마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생태가 살아나고 물이 살아나고, 가평삼회 생태복원지구
밖으로 나서니 햇살이 제법 뜨겁다. 차를 달려 가평삼회 생태복원지구로 향한다. 2010년 팔달상수원의 수질을 보호하고자 생태계 단절을 일으키던 옹벽들을 허물고 본래의 하천과 자연을 복원시킨 가평삼회 생태복원지구. 지금은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2급 왕은점표범나비, 층층 둥굴레, 천연기념물 원앙 등 보호종들이 살고 있고 학생들의 생태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 조금 걷다보니 탐방객 센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교육도 이루어지고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센터를 나서니 초록의 물결이다. 복원을 시작한 지 10여년이 되어서일까? 푸른 녹지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수질정화 및 자연천이 유도공간이다. 인공습지, 태양광가로등, 탄소 먹는 나무군락 등을 둘러보고 전망대에 올라가면 너른 복원지구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말벌과 살모사가 있다는 표지판에 겁을 살짝 먹었지만 생태계가 살아나면서 우리가 마시는 물까지 살아난다 생각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여름을 맞은 삼회생태복원지구는 긴 비에 공기를 씻은 듯 싱그럽다. 때마침 피어나기 시작한 여름 꽃들이 점점이 고운 색을 물들이고 있다. 생태복원지구 탐방은 10시와 2시, 하루 두 번 1시간 30분씩 운영된다. 시간을 맞춰 설명을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차에 오른다.
수종사에 올라 두물머리를 바라보며
이제 길은 북한강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향한다. 남한강과 북한강, 두물이 만난다 하여 두물머리가 있는 곳. 두물머리의 아름다움은 널리 알려져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도 그럴 것이 피어나는 물안개, 나루터, 수양버들 나뭇가지 등 강가 마을 특유의 아름다움이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발길을 돌려 수종사로 향한다. 수종사와 그 일대는 2014년 명승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양수리 수종사/ 가을이 오매 경치가 구슬퍼지기 쉬운데/ 묵은 밤비가 아침까지 계속하니 물이 언덕을 치네/ 하계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상방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조선시대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동방의 절 중 제일가는 전망이라 일컬으며 쓴 시이다.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오르니 수종사 현판이 보이고 석불상이 보인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생각보다 너른 절터에 두물머리가 내려다 보이는 장관이 펼쳐진다. 고즈넉한 사찰 분위기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세조가 금강산을 다녀오다 양수리에서 하룻밤 머물 때,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왕이 부근을 조사하게 하자, 뜻밖에도 18나한이 있는 바위굴이 있고, 굴 속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이를 기이하게 여긴 세조가 이곳에 사찰을 짓게하여 수종사(水鐘寺)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경내의 또 다른 볼거리인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또한 세조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사찰은 처음 중건했던 때의 건물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4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응진전, 약사전, 산신각, 종각 등이 있다. 대웅전부터 사찰을 둘러보니 저절로 마음이 경건해진다. 역시 나무로 된 것은 무엇이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면이 있다. 목조로 된 사찰 하나하나가 편안하게 사람들을 품어주는 것 같다. 사찰을 둘러보다 보니 차 마시는 삼정헌이 보인다. 근방에 생가가 있다는 다산 정약용 선생은 수종사에 들러 차 마시는 것을 군자유삼락이라 부르며 그렇게 즐겼다고 한다. 이곳에서 다선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도 정약용과 함께 차를 마시곤 했다니 차 한잔 안하고 지나칠 재간이 없다. 좌식 테이블이 정갈하게 놓인 삼정헌에 앉아 녹차를 한 잔 마신다. 다실에 앉아 한가로이 두물머리를 바라보니 마음이 평화롭다. 이런 게 신선놀음이 아닐까, 잠시 허황된 생각에 빠진다.
다산 정약용 유적지를 찾아서
다시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나 길을 재촉한다. 역시 내리막은 오르막보다 힘이 덜 든다. 수종사를 내려와 다산 정약용 선생을 기리는 유적지로 목적지를 잡는다. 얼마 달리지 않았는데 새로 만들어졌다는 다리 신양수대교가 보인다. 왕복 4차선, 널찍한 다리에서 바라본 북한강은 나지막한 산세와 어우러져 푸르고 아름답다. 공기까지 깨끗해 산 너머까지 보일 듯 가깝게 느껴진다. 이쪽 강물에서는 물결에 움직이는 나룻배가 슬쩍 보여 운치를 더한다. 다산유적지는 양수대교를 건너지 않고 팔당댐 방향으로 조금 달리다보면 나오는 마현에 위치하는데,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생가와 묘소가 있다. 이곳에 머무르면서 삼정헌에 들러 차를 마셨을 다산 선생.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다산기념관을 찾아 들어간다. 기념관에서는 그의 저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이 놓여 있고 거중기와 녹로의 모형이 비치되어 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부인 홍 씨가 유배지에 있는 다산을 그리워하며 써 보냈다는 하피첩.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에 시를 지어 보냈다니 남편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 마음을 다산은 이렇게 노래했다. “몸져누운 아내가 헤진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의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시가 다소 쓸쓸하기는 하지만 부부 사이의 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단아한 목조건물 여유당은 33칸의 전통 양반집으로 다산의 생가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놓은 것이라 한다. 집이며 가구며 글씨체가 어찌나 단정한지 한 치 흐트러짐이 없는 선생의 생전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집을 돌아 뒷동산으로 5분여 올라가니 양지바른 곳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신앙과 유배, 실학사상으로 정리되는 다산의 삶. 굴곡의 삶을 살다 갔지만 선생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어른이시다. 무덤 앞에서 잠시 고개 숙여 그의 삶을 떠올려본다.
18년 유배생활 동안 못내 그리워했다던 마현, 57세에 유배를 끝내고 돌아와 여유당을 짓고 75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책을 읽고 쓰고 연구하며 조용히 살았던 다산 선생. 생가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했는데 이것은 노자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는 곳이라는 생가의 말뜻처럼 어느새 유적지를 걷는 발걸음도 조심조심, 신중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또 여름의 짧은 한나절이 가고 있었다.
글. 신지선 사진. 김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