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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임금이 사는 집, 조선 궁궐에 담긴 뜻
작성일
2010-07-0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9150




조선 궁궐의 의미

궁궐은 임금이 사는 집이다. 그런데 이게 따지고 들어가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임금되기 전에 살던 집(잠저라고도 한다. 고종의 생가이며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대표적이다), 여행갈 때 머물렀던 집(온양행궁이나 화성행궁), 심지어는 죽은 자를 모신 사당(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를 모신 육상궁) 등도 모두 ‘궁’자가 붙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임금이 평소에 거주하고 정치행위를 펼친 정식 궁궐의 경우 크게 다섯 개가 있는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궁궐 다섯이 모두 존재했던 기간은 10년 정도밖에 안 되고 임진왜란 이전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임진왜란 이후에는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이 조선의 주요 양대 궁궐로 사용되었다. 경운궁(덕수궁)은 사실 조선의 궁궐이라기보다는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를 염두에 두고 중창된 장소였다.

조선의 궁궐은 소박한 편에 속한다.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이라는 창덕궁에 가도 건물은 듬성듬성하고, 전각의 규모도 그리 크지가 않다. 일제시기에 70~80% 이상 훼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조선의 궁궐은 소박하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거나 아니면 우리 것이 소박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곤 한다. 그렇지만 사실 이 두 가지 다 바람직한 대응은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 궁궐이 왜 소박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국가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며 그것이 자연의 윤리와 일치한다고 보는 학문이다. 이 설명에서도 바로 알 수 있겠지만,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과 같은 내면의 문제이지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다. 당연히 왕권의 정당성도 통치를 얼마나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국왕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거주하는 궁궐은 어느 정도 위엄을 갖추기는 해야 하지만, 그것이 크고 화려하다는 것은 백성들을 괴롭힌 흔적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을 단순히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경제력이 안 됐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못 사는 나라의 경우에도 거창한 건물들은 세워질 수 있다.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은 국가 전체의 경제력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부가 어디에 편중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궁궐은 소박하다는 그 점에 바로 조선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며, 조선의 특색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사람들은 궁궐에 어떠한 의미를 담았을까? 조선의 정궁이며, 조선이라는 나라의 밑그림을 그린 정도전鄭道傳이 전각의 이름을 붙인 경복궁을 통해 조선 궁궐에 담긴 의미를 탐색해보자.

 

세 개의 전각 구성

경복궁에는 크게 3개의 중심 전각이 있다. 왕의 침실인 강녕전康寧殿,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殿,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이다. 침전은 빼고 조선 궁궐의 편전과 정전은 모두 정政자 돌림이고, 정문의 이름은 화化자 돌림이다. 침전은 왕의 침실이요, 편전은 일상적인 정치 행위가 펼쳐지는 곳이다. 정전은 신하들이 모두 모여 국가적인 의례를 펼치는 장소이다. 이 세 공간 모두 궁궐에는 없어서는 안 될 곳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국가나 궁궐에서 이 세 공간이 똑같은 위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전 시기에 비할 때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면서 그 위상에 있어서 변화를 가진 곳이 어디였을까? 조선의 특징을 볼 수 있는 바로 그곳 말이다. 그곳은 바로 편전인 사정전이었다. 고려 말 관료들은 정치 논의를 위한 공개적인 장소로 편전을 주목했다. 왜냐하면 원간섭기 군주들은 소수 측근들을 데리고 궁중 깊숙한 밀실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관료들은 밀실에서 정치를 행하지 말고 공식적인 장소에 나와서 정치를 행할 것을 주문했고, 그럴 때 주목된 장소가 바로 편전이었다.

또 한편 공개적으로 정치를 논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임금이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나이도 지긋하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과 함께 임금이 공부를 해서 더 나은 군주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주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지만, 사실 이는 성리학 사회에서야 전면에 대두된 문제였다. 그 이전까지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군주가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며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 말고도 군주는 신성한 혈통을 지녔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성리학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질에 차등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누구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얘기는 역으로 군주라 하더라도 열심히 수양하지 않으면 성인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양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 방법이 바로 『대학大學』에서 규정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이다. 흔히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은 알 텐데, 그 말 앞에 있는 것이 바로 성의정심과 격물치지이다. 이들을 합쳐 대학의 8조목이라고 한다. ‘격물치지’는 사물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각하고 공부하여 앎에 이르는 것을 이른다. 군주가 격물치지를 하는 방법이 바로 경연이고, 그 경연의 장소가 편전인 사정전이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편전에 사정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천하의 이치를 깨달으려면 사思, 즉 생각을 지극히 해야 한다고 했다. 공부와 정치의 기본은 바로 ‘생각’이니까.

 
 

 ‘성의정심’ 임금의 수신 방법

그런데 이렇게 편전에서 공부만 하면 자기 수양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리학에서 격물치지보다 어떤 면에서 더 근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의정심’이다. 공부를 하는 주체의 자질을 잘 닦아놓는 것, 공부를 하면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바탕을 닦아 놓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뜻이 담겨 있는 곳이 바로 침전인 강녕전이다. 강녕전은 군주가 편히 쉬고 잠자는 곳인데, 정도전은 그런 공간이야말로 더욱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강녕이란 말은 ‘편안함’이라는 뜻으로 오복五福 중 하나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을까? 정도전은 임금이 마음을 바루어서 그 자신이 도덕 그 자체가 되면 오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왜 그 이야기를 하필이면 침전에 하는가? 그건 바로 침전이 홀로 거처하는 곳이어서 마음이 흐트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녕전과 사정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강녕전에서 성의정심을, 사정전에서 격물치지를 한다면 임금이 수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수신이 되어야만 군주는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는데, 치국평천하의 공간이 바로 정전인 근정전이다. 정치에 부지런 하라는 근정전의 의미는, 방향 없이 군주가 모든 일에 부지런할 것을 주문한 것이 아니었다. 정도전은 임금이 부지런할 일은 하급 관리들 하는 일까지 모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어진 이를 찾고 그에게 적당한 일을 빨리 맡기는 것뿐이라고 보았다.


수신과 치국의 연속성

이처럼 성리학적 세계에서 수신의 문제는 치국과 분리된 것이 아니고 연속된 것이었다. 수양이 된 군주여야 바른 정치를 행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 정치는 군주가 단독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신이 된 군주와 수신이 된 관료가 함께 정치를 행하고, 도덕적으로 교화된 백성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 그것이 바로 조선이 꿈꾼 세상이었다. 비록 이상과 실제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회였다. 돈을 많이 벌고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욕망과 이익을 좇아다니는 삶은 도덕적이지 않다고 금기시했던 사회였다. 지금의 우리가 조선을 이해하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지금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글·장지연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사진제공·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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