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국가유산사랑

제목
고조선을 말하는 청동기 문화
작성일
2016-10-06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7184

고조선을 말하는 청동기 문화 고고학, 고조선을 말하다 01 비파형동검 ©국립중앙박물관

 

청동유물 통한 고조선의 배경

비파형동검을 고조선과 처음 연결한 것은 1960년대의 북한 학계였다. 이후 1970~80년대를 거쳐 비파형동검·석관묘·미송리형 토기라는 소위 ‘고조선의 3대 요소’가 요동~서북한 일대(기원전 9~6세기)에 나타났으며 이는 고조선의 근거가 됐다. 또한, 중국 선진(先秦)시대의 역사기록에 본격적으로 고조선이 등장하는 거의 최초의 문헌인 『관자』는 후대에 많이 고쳐 쓰이긴 했지만, 이 책을 저술한 관중(管仲)이 기원전 7세기경 인물이기 때문에 비파형동검의 출토 시기와 부합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비파형동검은 발해만 유역~한반도 일대까지 널리 분포한다. 그리고 내몽골 동남부는 물론 흑룡강성 남부지역에서 일부 발견됐으며, 산둥반도와 하북성 일대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한반도에서도 역시 약 60여 건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바 있다. 비파형 동검은 요서지방 발해만 일대에서 기원전 9세기대에 나타났으며 내몽골 동남부의 하가점 상층문화(내몽골 적봉시(赤峯市) 하가점(夏家店)의 상층 유적)와 요동지역 일대로 퍼졌다.

고조선의 실체는 비파형동검과 함께 청동거울의 존재로도 증명된다. 한반도와 요령성 일대의 청동거울은 그 뒷면에 새겨진 문양에 따라 번개무늬 거울, 거친무늬 거울, 잔무늬 거울 등으로 나뉜다. 동검과 청동거울은 요서지역에서 발생한 이후 점진적으로 요동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으로 퍼졌다.

칼과 거울은 지금도 시베리아의 샤먼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의례도구이다. 고대에도 단순한 무기의 의미를 넘어 권력과 신력을 상징하던 도구였다. 동검과 청동거울의 전통이 요서지역에서 출발해 한반도는 물론 일본 구주지역에까지 확산되는 모습은 바로 기원전 1천년대에 동북아시아가 동검을 매개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들 모두가 고조선의 영역은 아니며 고조선, 삼한, 왜의 소국 등이 지역과 시간차이를 두고 수장의 무덤에 청동거울과 동검을 묻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고조선 초기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요령성 심양시의 정가와자 6512호 묘에서는 청동거울과 다수의 동검이 출토돼서 고조선 귀족의 무덤 또는 왕족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유적은 대체로 기원전 6~5세기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8~7세기대에 요서지역에서 유행했던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 유형의 비파형동검 문화가 요동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남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기원전 4세기경 연나라가 요령 지역으로 진출할 때 후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서북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당시 다뉴세문경과 초기 세형동검의 조합이 남한 금강유역에 등장하면서 이는 고조선 유민이 마한의 초기 중심 세력이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고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요령~서북한 지역에 자리를 잡은 후, 동검과 청동거울은 남한의 청동기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파형동검 문화는 고조선을 중심으로 기원전 1천년대 동아시아 동검 문화의 형성과 전래를 증명한다.

물론 비파형동검 문화가 고조선과 가장 유사한 실체이긴 하지만 무조건 ‘비파형동검=고조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고학에서 국가를 인정하는 기준은 수도, 왕릉, 그리고 무덤에 현격한 신분 차이 등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 이러한 징후가 뚜렷하지 않다. 분명한 점은 요동~서북한의 비파형동검 문화~세형동검 문화는 황하 유역의 북중국 청동기 문화나 유목민족의 오르도스식 청동기 문화와는 구별되는, 한반도를 포괄한 청동기 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단순하게 고조선이 언제부터인가라는 논쟁을 현재로서는 해결하기 어렵지만, 어떠한 물질문화적 배경에서 성립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고고학의 역할이다.

비파형동검은 청동 무기의 본격적인 등장을 뜻하므로 다양한 방어 도구와 함께 발견된다. 특히 요서지역에서는 청동투구가 발견되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고조선의 서쪽에 위치한 하가점 상층문화(기원전 10~7세기)에서 사용되었다. 고조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지역에서 투구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목제 투구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비파형동검을 묻은 무덤의 시신 가슴 근처에서는 원형의 청동판도 종종 발견되는데, 갑옷과 같이 몸통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청동은 무기뿐 아니라 장식으로도 썼는데, 대표적으로 청동단추가 있다. 보통 청동단추는 옷에 붙였는데, 정가와자 유적에서는 장화의 장식으로도 사용되었다. 지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청동단추들은 푸르스름하지만, 사용 당시에는 금빛으로 아주 화려한 장식 역할을 했다.

02 다뉴세문경 ©국립중앙박물관

 

명도전, 흉노, 그리고 고조선

『위략(魏略)』에는 소왕(昭王, 기원전 311~279) 대인 기원전 4세기 경에 연나라와 각축을 벌이던 고조선이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공격을 받아 서쪽 2천여 리의 땅을 잃고 그 중심지를 동쪽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기원전 320년을 전후하여 연을 비롯한 중국은 고조선을 스스로 왕을 칭한 강력한 국가로 보았다. 진개는 기원전 300년경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기원전 280년경에는 고조선을 침략해서 만번한(滿潘汗: 고조선시대 중국의 연과 경계가 된 지역의 명칭)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로 연나라의 수도인 연하도에서 진개의 활동과 관련된 자료가 발굴되었다. 바로 연하도 유적의 신장두(辛庄頭) 30호 묘이다. 이 무덤에서는 한국식 꺽창과 중앙아시아와 흉노계통의 금장식도 출토되었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와 고조선에서 전쟁을 했다는 기록과 부합된다.

03 3호 비늘갑옷 출토 상태 04 23호 굽은 칼과 88호 철화살촉

한편, 고조선은 중원과 무역을 하며 그 부를 쌓았다. 앞서 등장한 『관자』에는 호랑이 같은 맹금류의 얼룩무늬 가죽이 고조선의 특산품이라고 되어 있다. 실제 고고학적 자료를 분석하면 고조선이 본격적인 모피무역을 한 것은 기원전 4세기대로, 이때 서북한 일대에 대량으로 발견되는 명도전(연나라 화폐)과 관련이 있다. 모피류 동물은 주로 백두산 일대의 험한 산간오지에 있었기 때문에 고조선의 중심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최근에는 고조선이 모피 산지와 중국의 산둥반도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모피를 교역했다는 연구가 제기되고 있다.

 

세계사적인 보편성과 고조선 연구의 실체적 접근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에 한나라 조정의 사관이었던 사마천은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다. 『사기』의 <조선열전>에 자세히 전쟁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을 조사하던 일본의 어용학자들은 평양 일대를 조사하면서 의도적으로 고조선의 유적과 역사를 찾아보지 않은 채 낙랑에만 연구를 집중했다. 낙랑군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워진 것이라는 역사적 상식을 도외시한 채, 그저 낙랑군만 서술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중국과 일본학계에서 고조선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는 지난 100여 년간 사실상 없다. 그 결과 한나라가 만든 식민지(낙랑군)는 연구가 활발하지만, 정작 한나라가 무너뜨린 나라(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다행히 고고학 자료를 통하여 비파형동검 문화의 전개와 이후 철기 시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고조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무조건 고조선의 영역을 지나치게 넓고 역사가 오래됐다고 보거나, 반대로 고조선의 위치를 부정하는 선입견을 통한 연구는 고조선의 실증적인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조선은 유령의 나라도, 대륙을 지배한 거대한 제국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보면 중국과 각축을 벌이고 북방 초원지역과도 교류하며 중국 동북지방~한반도 북부지역에 존재했었던 국가였다. 고조선에 대한 실체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민족의 자존심을 넘어서 동아시아 고고학·고대사, 나아가서 세계사적인 국가형성이라는 보편성에서 봐야 한다. 냉전 시절인 1980년대에 소련에서도 고조선에 관한 단행본이 출판될 정도로 고조선은 한국사를 대표하는 연구 주제가 되었다. 이는 바로 동북아시아 고대사 속에 고조선의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역사는 광활한 영토와 장구한 시간적 범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합리성에 근거한 설득력 있는 연구에 있다. 고조선의 연구와 교육이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이렇게 우리나라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의 시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이 고조선 연구에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글‧강인욱(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