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사랑
- 제목
- 엽서의 탄생, ‘조선과 조선인의 표상화’
- 작성일
- 2014-07-03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7703
엽서의 역사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됐는데, 처음에 편지를 대신하던 엽서는 단순히 우편기능뿐 아니라 사진이나 그림이 더해지면서 대중들의 수집과 기념품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1900년 경 대한제국 정부에서 엽서를 발매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는 이미 엽서가 서구에서 유행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관제엽서가 생산되는 것과 동시에 당시 한국의 경관을 담은 사진엽서도 발행됐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의 조선 진출이 본격화되는 시기부터는 일본인들이 조선 관련 사진엽서 생산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전쟁을 기념하는 각종 기념엽서와 전쟁에 승리한 천황과 장군들의 이미지가 대량으로 복제되어 인쇄산업의 호황기를 맞게 됐으며, 동시에 사제엽서(私製葉書)의 생산과 유통이 허가되어 엽서의 생산량이 급증하게 된다. 이미 일본에서는 서구인들이 개항장을 배경으로 일본인들의 풍속사진을 기념품으로 상품화시킨 사례가 있었다. 일명 ‘요코하마 사진’이라고 불린 이러한 풍속사진의 열풍을 엽서화시켜 조선에 적용하게 된 것이 바로 ‘조선풍속’과 같은 엽서 시리즈이다.
일제강점기의 조선풍속을 담아낸 사진엽서가 주류
조선총독부뿐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해 생산된 엽서(주로 사진엽서)는 일제강점기 내내 꾸준히 지속된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식민경영의 치적을 홍보하기 위한 엽서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민간에서는 조선인들의 일상생활뿐 아니라 경성·부산·평양 등 주요도시의 경관을 담은 엽서들이 일본인들의 관광기념품으로 생산됐다. 특히 다양한 조선인들의 사진들은 ‘조선풍속’이라는 이름을 달고 8~10장씩 묶음으로 팔려나갔다. 이들 엽서에서 조선인은 다양한 이미지로 재현되어 있는데, 주로 남성과 여성 혹은 계층별로 분류되거나 노동 현장이나 시장, 관혼상제의 의례 등이 담긴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 일부는 스튜디오에서 정교하게 구성된 사진에서부터 길거리 우연히 찍힌 사진까지 온갖 조선인들의 이미지가 상품화됐다.
일제강점기 조선 관련 사진엽서들은 시간에 따라 좀 다르게 재현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기생 이미지는 1900년대부터 광복 직전까지 꾸준히 생산된 이미지 중 하나였다. 1910년대까지는 상당수의 엽서에서 기생은 주로 기예(妓藝)를 보여주거나 화려하게 차려입은 이미지가 많았다. 화려한 색과 무늬가 있는 복장과 족두리를 쓴 기생의 이미지는 풍속적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1910년대 후반 이후부터 기생의 이미지가 변화를 맞게 된다. 전통적 복장에서 풍기던 풍속적 이미지에서 점차 외모와 복장, 자세 등이 바뀌게 된다. 기예보다는 기생의 외모 자체를 부각시킨 이미지가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복장에서 풍기는 전통적인 이미지에서 점차 세련된 복장과 포즈를 띤 사진들이 소비되어 갔다. 당시 기생들이 대중문화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면서 예능인으로서의 매력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변모하게 됐던 것이다.
관광기념품으로 여전한 인기를 얻고 있는 사진엽서
기생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초기 유행했던 조선풍속류의 엽서 이미지는 1930년대 들어 인기가 시들해지고 대부분 도시 이미지를 담은 기념엽서로 전환된다. 대개 경성팔경이니 하는 방식으로 8장과 10장으로 구성된 묶음이 대다수였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는 일본인들의 조선관광을 진흥시키기 위해 안내 광고 인쇄물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조선의 토산품들이 관광기념품으로 만들어지고 조선의 주요 도시의 대표적인 건물들이 엽서로 인쇄되어 상품화됐던 것이다. 특히 경성은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도시로서 다양한 형태의 기념엽서가 제작됐다. 이러한 상품 중 ‘경성백경 (京城百景)’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엽서는 32장에 1개에서 많게는 5개의 이미지를 편집해 총 100개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형태로 제작됐다.
광복 이후에도 사진엽서는 꾸준히 생산되어 현재도 관광기념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엽서 이외에도 많은 형태의 기념품들이 만들어졌지만, 엽서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을 위한 기념품으로 남아 있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을 방문하는 이방인들이 엽서를 사는 것은 편지를 쓰기 위해서보다는 그것에 재현되어 있는 도시의 이미지를 기억하거나 기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세기 말 우편의 기능으로 처음 만들어진 엽서의 역사는 이미지가 입혀지면서 20세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으며, 여전히 뭔가를 재현해 가는 역사를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엽서가 라디오 사연 보내기와 같은 열풍 속에서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전자우편(이메일)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엽서를 사용하는 일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사진엽서는 현재까지 우리뿐 아니라 타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하나의 아이템으로 남아 여전히 지속과 변화를 거듭해 가고 있다.
글·사진 권혁희(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